취향은 개인의 조각이지만, 때로는 전체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취향을 존중받을 권리만큼은 사수해왔다고 자부하는데, 안 먹겠다는 아이를 밥숟갈 들고 쫓아다니는 극성스런 부모도 아니었지만, 유치원의 단체활동에서 빠지고 싶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아 못하겠노라고 또박또박 말해 뭇 어른들을 당황시킨 아이였다. 배경은 아마도 방임주의의 탈을 쓰고 불안해했을 것이 분명한 내 어머니의 훈육방침일 텐데, 어디에 뿌리를 두든 간에 어린이 안현진의 취향은 충분히 존중받았다. 편식과 까탈도 취향이라면 말이다.
얼마 전 생일을 맞아 부모님 댁에 내려갔는데, 밥상머리에 앉을 때를 빼고는 선물로 받은 닌텐도DS를 붙들고 있었다. 가뜩이나 늦게 일어나 <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압인! 싸워라! 응원단!>의 미션을 클리어하느냐 마느냐에 몰두하고 있자니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이제는 부모님 집에서조차 품 안의 자식은 아니겠구나 싶더라.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돼서야 겨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도 주중에 얼마나 바빴으면 저리도 달게 잘까 내버려두고, 서른을 바라보는 처녀가 온종일 손바닥만한 게임기를 붙들고 열을 올려도 그러려니 지나간다. 아예 없던 취향이 만들어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온 사람들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우기는 나의 취향을 인정해준다. 게으름과 뻔뻔함도 취향이라면 말이다.
사회에 나와보니 취향에 대해서 조심스럽다. 취향에 대한 한마디가 나라는 인간을 표시하는 좌표가 될까 말고르기를 하게 된다. 이 반찬은 싫다고 말하기 전에 혹시나 윽박지름당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어린 날보다 더 떨리는 순간은, 나름대로 기대하던 영화의 시사회가 끝난 바로 뒤다. <씨네21>에 입사하기 전 코드가 맞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풀던 수다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저마다의 오장육부를 건드린 장면을 꺼내며 별다른 설명없이 환호에 가까운 괴성을 외치던 무리들과 함께한 영화 뒷담화의 추억도 까마득하다. 영화 어땠냐는 시사 뒤 흡연 타임은 대부분 자신이 없는데, 질문자의 취향에 대한 사전정보와 그가 짓는 표정만으로도 나와 취향이 1억 광년쯤 떨어져 있겠구나 싶을 때면 머리는 바빠지고 말은 입 안에서 구른다. 혹평하기는 한국영화나 외화나 마찬가지로 쉽지만, 좋았다고 말하기는 한국영화가 더 어렵다. 원어민만이 알아듣고 즐길 수 있는 뉘앙스로 충만한 텍스트를 서로 다른 입맛으로 읽어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도 어떻게 봤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건, 스스로 만들어놓은 취향의 수준이 아직 밑바닥에 자리하기 때문이리라. 시간이 지나서 내공이라는 것이 쌓이면 영화에 대한 나만의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까? 영화기자들 틈에서 중간이라도 가보려는 나는 호수 위 백조처럼 설레발에 바쁘다. 취향도 자라날 수 있다면 말이다.
덧붙여, 취향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현정 기자의 <씨네21> 떠남을 알리는 것이 내 몫이 됐다. 오래는 아니었지만 데스크로 고생해주신 선배의 송사를 구구절절 길게 뽑지 않은 것도 나의 취향으로 존중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