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상어를 부탁해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가까이서 본 편집광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가까이서 본 편집광님의 말(이하 편집광): 요즈음은 아주 큰 영화 아니면, 작은 영화뿐이네요. 같은 시기에 상영되는 영화인데도 성격과 상영방식이 극에서 극이에요.

상어를 부탁해님의 말(이하 상어녀): 큰 영화로부터 범람한 관객이 흘러들어오길 기대하는 작은 영화도 있겠죠.

편집광: 큰 영화에서 아무리 흘러넘친다 해도 관객은 좋아하지 않는 성향의 영화를 귀신같이 알아채서 절대 실수하는 법이 없죠. 요즘 관객은 너무 취향에 자신만만해요. 가끔씩 속아주시는 느낌도 있어야 하는데. -.-

상어녀: 착각으로 들어간 극장에서 ‘내 인생의 영화’를 만나는 것 말이죠? 전 예전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욕망의 낮과 밤>을 두명의 아저씨와 대낮에 본 적이 있어요. 영화를 오해하고 표를 산 어르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보고 가시더라고요. 저보다 더 깊은 감흥을 받으셨을 수도 있죠.

편집광: 인생에서 그런 실수와 우연의 맛이 좀 있어야 하는데! 취향의 경계는 희미할수록 바람직한 것 같아요. 취향도 학습될 수 있고 변경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너무 명확한 취향은 그런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니까요. 취향은 경도(硬度)가 중요해요. 딱딱하면 곤란하죠. 부드러워야 해요.

상어녀: 얼마 전 정구호 디자이너를 인터뷰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나는 대답이 있어요. 아름다움에 예민하다보면 추한 사물에도 민감해서 스트레스가 있지 않나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아니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특정한 가치의 기준을 택하고 그 최고치를 향해 사력을 다하는 건 다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그 잣대로 온 세상을 줄 세우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죠.

편집광: 나이가 들수록 저도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상어녀: 자꾸 그러시면 이 기사의 일러스트가 늙게 그려지는 수가 있어요. ^.~

편집광: 에잇, 다음주부터는 혀 짧은 소리로 어린이영화만 이야기할까봐….

상어녀: 하지만, 일단 오늘 이야기해야 할 <내일의 기억>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중년 남성과 그 부인의 드라마예요. 주연 와타나베 겐이 방한했을 때 인터뷰도 하셨죠?

편집광: 저는 예술가의 경우 위엄이 풍기는 사람들이 좋은데, 직접 만나보니 와타나베 겐이 그랬어요.

상어녀: 역시 그렇군요! 외모나 분위기가 할리우드 고전기의 남성 스타를 보는 듯한 배우예요.

편집광: 바로 그런 점이 할리우드가 그 배우를 자주 활용하는 이유겠죠. 일단 이목구비부터가 상당히 고전적이고 뚜렷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인터뷰 기사를 쓰고 나서 제목을 ‘어떤 위엄있는 일본인의 얼굴’이라고 달았더니, 그 밑에 쭈욱 댓글들이 달렸는데 절반 이상이 “머리만 크면 위엄있는 거냐?”라는 거였다는…. -_- 머리 크기가 기타 모든 인간의 품격을 압도하는 세태라니요….

상어녀: 키도 훤칠한 배우던데요. 그렇게 한마디로 어떤 인간을 일축해버리는 표현들은 불편해요. 싫어요. 머리 크기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호감, 비호감이라는 표현도 싫고 같은 맥락에서 “아무 이유 없어!”하는 유행어도 꺼림칙해요.

편집광: 전 싫은 정도가 아니라 혐오합니다. 이유있게 싫죠. 와타나베 겐은 무슨 질문을 해도 제대로 발효되고 숙성된 대답을 하더군요. 삶에서 직접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쳐 지혜를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들 같았어요.

상어녀: 기자시사회 시작 전 와타나베 겐이 무대에 올라서 “사무라이도 닌자도 게이샤도 나오지 않습니다만 이곳이 그렇듯 일본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라고 유창하게 소개한 다음, 허리를 아주 깊숙이 숙여서 인사를 하고 나갔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 깨달았어요. ‘아까 그분은 인사라기보다 영화 속 인물 사에키로서 일종의 연기를 한 거였구나.’ 그래서 더 감탄했죠.

편집광: 와타나베 겐이 말하길, 영화를 위해 리서치하다가 전문가들로부터 안 사실인데 치매 환자는 설사 배우자의 얼굴과 이름을 잊어도 그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안다는 거예요.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이 남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구원처럼 느껴졌다는 말에 공감했어요.

상어녀: <내일의 기억> 중 병원장면에서 의사가 “드물지만 이 병은 20대에서도 발병 사례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뒷좌석 누군가가 “손예진!”이라고 말하더군요. ^_^ 아무래도 일본 드라마를 각색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쉽게 연상되는 영화죠. 그런데 저는 그 작품의 경우보다 이 영화가 소재를 잘 활용했다고 봐요. 기억의 유실로 인한 착오나 실수가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샐러리맨을 통해 알츠하이머병을 훨씬 실감나게 그렸어요.

편집광: 동의해요. 병의 특성과 이야기 성격이 제대로 맞물린 경우죠. 저는 이 영화가 소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향취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인들은 그 영화를 만듦에 있어서 무엇보다 소재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거죠. <내일의 기억>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와 특히 그 가족들을 누구보다 신경쓴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어녀: 그것도 영화의 윤리일 수 있겠죠.

편집광: 영화인의 윤리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서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도 스릴러적이고 코미디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재에 대한 예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끝까지 세심하게 애쓴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도 그렇고요. 단순히 윤리문제만도 아닌 것이 그런 영화들에는 특유의 향이 있어서 보는 이에게 정서적으로 깊은 감흥을 줘요.

상어녀: 영화 속에서 사에키가 광고회사를 병으로 그만둔 뒤 부인이 직업을 갖잖아요? 그녀가 점장으로 승진한 날, 사에키가 저녁밥을 먹다가 불현듯 “내가 문제야. 나 때문이야” 하면서 엉엉 울지요. 대사 자체는 예측 가능한 것이지만, 그 말을 하는 사에키의 태도가 감정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은 어린아이의 그것이라 더욱 마음이 아프더군요. 저는 와타나베 겐의 연기가 전체적으로는 다소 과장됐지만 그런 장면에서는 주효했다고 봐요.

편집광: 사실 이런 영화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다양한 연기를 하는 게 쉽지 않죠. 매번 울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그런데 와타나베 겐은 이 영화에서 매 순간 정말 그 모든 일들을 처음 겪는 것처럼 반응하는 연기를 하는 것 같아요. 의사로부터 병을 통보받는 순간부터 훌륭했어요. 분노와 당혹과 부정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상어녀: 의사에게 “남의 병을 발견하니 신나니?” 하는 대사, 공감하는 관객 많을 거예요.

편집광: <우아한 세계>에도 나오잖아요. “당뇨가 감기야?”

상어녀: 그러나 트집을 잡자면 <내일의 기억>은 관객이 반찬 한 가지라도 빼놓고 먹을까 일일이 젓가락으로 집어주는 영화랄까. 지나치게 생략에 신중해요. 예컨대 알츠하이머 테스트지를 1번부터 끝까지 관객이 같이 지켜보며 풀게 되리라고는…. +_+

편집광: 확실히 이 영화는 노인이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죠. 지혜로운 노인이긴 하지만. 그러나 말씀하신 장면은 건너뛰지 않는 것이 더 좋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흥미롭고 리얼했어요.

상어녀: 무의식중에 같이 풀다가 몇개나 틀린 사람은 적잖은 충격이 있다고요. T-T

편집광: 헉. 지폐를 세면 옆에서 따라 세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더니…. -_-#

상어녀: 젊은 시절 아내와 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그들의 추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자기 장인과 재회하는 시퀀스도 재미는 있지만 의미도 불명하고 과도하게 늘어져요. 편집광: 그 지적에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상어녀: 와타나베 겐의 부인으로 분한 히구치 가나코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여배우더군요. 알츠하이머병은 배우자에게도 커다란 생의 전환점이라는 점을 힘주어 보여준 것이 좋았습니다.

편집광: 두 배우는 진짜 부부 같았죠. 일본의 ‘김혜자-최불암’ 같다고나 할까. 결국은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죠.

상어녀: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특히 슬프고, 이런 표현 조심스럽지만, ‘영화적’인 까닭은, 사람의 겉모습은 그대로 둔 채 영혼이 빠져나가서 사랑하던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병이어서일 거예요. 그런데 달리 보면 알츠하이머병이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그런 변화를 느낄 때가 있지 않나요? 어쩌면 나이 들어가며 우리 모두 이 영화의 인물과 비슷한 상황을 아주 느리게 겪고 있는지도 모르죠.

편집광: 확실히 이 소재는 강력하게 멜로드라마적인 구석이 있어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