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사건 이후, 서방세계에서 이슬람과 관련한 국적, 인종, 종교에 대한 이미지는 곧바로 테러를 연상시킨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유색인’ 전체로 확대되어 아시아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무차별 구타 같은 대중의 보복과 그 공포 때문에 거리에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9·11은 ‘이슬람 남성’에 의해 저질러졌지만, 이들 ‘가해자’의 복합적인 정체성 중 “이슬람”만 강조되었을 뿐 “남성”이라는 성별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모든 대중매체에서 9·11 사건은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만 분석되었지, 성별(남성성)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테러범들이 무역센터 공격 전날 “내일 미국은 피로 물들 것”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술을 퍼마시며 누드 댄서와 춤을 추는 등 서구문화를 즐겼다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이중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자살 테러나 출정 전야에 ‘술과 여자’로 폭력 수행의 두려움과 긴장을 달래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반대’인 서구문화의 특징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친 보편적인 남성 문화다.
‘반미성전’이든 ‘테러와의 전쟁’이든 이는 특정 집단간 갈등이다. 즉, 남성 대 남성의 갈등인데, 마치 남자가 인간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듯이 ‘서구와 이슬람의 전쟁’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 역사상 모든 전쟁과 테러는 남성이 행해왔기 때문에 범인이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일 수도 있고, 역사를 독점적으로 주관하는 존재는 남성이므로 “남성=이슬람=국가”라는 인식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전쟁, 폭력, 테러는 성별 중립적인 사회현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남성성이나 남성다움에 대한 숭배는 분명, 폭력의 발생과 해석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공항에서의 검문검색과 보복 테러는 여성을 포함한 이슬람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구 남성을 포함한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행해졌어야 하지 않을까. 9·11은 ‘남성’이 저지른 범죄인데, 왜 백인 남성은 보복의 공포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단 말인가.
미국은 우리의 ‘정서’(집단주의와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를 비웃었지만, 사건 초기 버지니아 공대 사태의 용의자가 “아시아 남성”으로 보도되었을 때, 그가 한국인이 아니기를 바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한국 정부와 재미 한국인 단체에서 “사과”, “조문” 등의 용어가 나온 상황과 논란에 대해 여기 쓸 생각은 없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모두 그렇듯이, ‘조승희’도 남성, 미국 영주권자, 재미동포, 20대, 대학생, (아마도) 이성애자, 비장애인 등 다양한(multiple) 정체성을 가졌다. 이 많은 정체성 중 어느 하나만으로 그를 설명할 수는 없다. 모두가 맥락에 따라 한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9·11과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성은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서 압도적으로 국적(인종), 하나로 환원되었다. ‘전문가’들이 진단한 사건의 배경은, 총기문화, 이민 부적응, 따돌림에 대한 분노, 동포사회의 한국적 가족 문화, 지나치게 내성적 성격 등이다.
하지만 미국의 총기 문화 때문이라면, 왜 미국에 사는 장애인, 어린이, 여성들은 그런 사건을 안 저지르는가? 이민 1.5세대 아시아인 중 여학생이 교실에 들어가 수십명을 확인 사살하는 경우가 있는가? 흔히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하는 논리 중에 ‘술과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여성은 술을 마셔도 남성을 강간하지 않으며, 스트레스가 많은 남성도 습관적으로 직장 상사를 폭행하지는 않는다. 그런 남자들은 술을 마셨든 스트레스가 쌓였든 간에 꼭 ‘집에서 부인’을 때린다. 남성 폭력의 원인이 술이나 스트레스 탓이라는 생각은, 여성과 달리 남성은 ‘억압’받거나 술 같은 촉매제가 있으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저질러도 된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언제나 남성성은 문제화되지 않고, “한국인이냐 흑인이냐 빈곤층이냐 중산층이냐” 등 다른 정체성이 사건의 ‘진짜’ 원인으로 부각되고 대책도 이를 근거로 논의된다. 원인은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조승희’의 많은 정체성 중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도 사건의 격발 요소 중 하나라고 고려하고, 그의 ‘한국인성’을 상대화한다면, 이번 사태는 전세계 남성 문화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한국인’이 그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