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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충무로를 휘저은 몇 가지 사건들
2001-02-16

유현목(18) - 문예영화, 쿼터딱지 그리고 스타시스템

1962년의 새로운 영화법은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의 폐쇄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제시대부터 탄압과 빈곤과 싸우면서 견뎌온 윤봉춘, 이규환, 이병일, 전창근 등의 노장들이나 해방 뒤 등장한 대다수 신진감독들은 개인 프로덕션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손을 놓아야할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16개 제작회사들은 시내에 있는 창고들을 빌려 등록기준이 요구하는 200평 이상의 스튜디오 규모를 대충 갖춰놓았다. 감정날짜가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카메라 같은 기재를 서로 잠시 빌려주며 눈가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60킬로와트 이상의 조명기재도 마찬가지였다. 녹음·현상시설도 각 회사가 단독으로 갖추기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우리 실정에 어두운 관리들의 무모한 한국영화육성법안은 난센스였다. 새 영화법에는 각 회사가 연간 15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제작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었지만, 단일 회사들은 3∼4편의 영화를 제작하기에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법적으로 자격을 상실한 개인 프로덕션들이 등록회사로부터 비밀리에 명의를 빌려서 제작활동을 했다. 이처럼 명의를 빌려서 등록사의 영화제작권을 얻는 것을 그 당시 충무로에서는 ‘제작쿼터’라고 불렀다. 이러한 제작쿼터를 얻기 위해서 개인 프로덕션은 고액의 돈을 등록회사에 지불해야만 했다. 등록회사쪽은 의무제작편수 15편을 채우지 않더라도 수입은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15편을 채우고 나면 영화법에 의하여 외국영화수입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꿩먹고 알먹는 격이었다.

그 당시 외국영화수입은 오늘날처럼 무한정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연간 24편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외화수입권 24개 중 16개는 16개 등록회사에 1개씩 분배해주고 나머지는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우수작품상, 그리고 반공영화 최우수작품상에 수여했고 나머지는 정책적인 필요에 따라서 분배해 주었다.

희소가치가 높던 외화수입쿼터는 그 쿼터딱지만도 당시 돈으로 2억∼3억원으로 경매하듯 팔려나가는 실정이었지만, 외화가 워낙 귀하던 때라 흥행수익도 커서 등록사들은 직접 수입하여 거액을 챙겼다. 외화수입쿼터가 따르는 대종상을 받기 위해 각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문예영화를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 돼 창고 속에 처박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수입쿼터만 받으면 훨씬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때문에 대종상 수상을 위해 필사적인 로비가 성행하는 폐습도 있었다.

그 당시 영화계 전체의 동향을 보면 1960년 연간 제작편수가 87편이었는데 1969년에는 229편이라는 놀라운 증가추세를 보였다.등록회사의 명의를 빌려 제작한 영화가 해마다 전체 제작편수의 3분의 2가 될 만큼 개인 프로덕션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져 영화법의 제도적 모순을 보여왔다.TV보급이 100만대에 이르는 1972년까지 영화는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해 전국의 영화관 수도 1962년에는 344관, 1965년에는 529관, 1968년에는 무려 597관으로 대폭 증가하는 추세였다.

나의 작품 <아낌없이 주련다>(1963)에서 공연한 신성일과 엄앵란은 이 작품의 흥행성공으로 스타덤에 오르면서 이른바 스타시스템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영화가 양산되는 와중에 이 두 사람에겐 모든 청춘영화의 출연교섭이 쇄도했다. 시골극장의 선전간판에 신성일과 엄앵란의 얼굴이 나타나면 관객은 영화제목도 모른 채 무조건 입장하는 추세였다.

미리 제작비를 대주는 지방흥행사들도 시나리오책의 배역란에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있으면 시나리오도 검토않은 채 무조건 일반 작품의 두배쯤 더 쳐주었다. 이런 실정이었으니 제작자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출연료를 제시해 끌어안으려 했다. 신성일의 경우에는 30여편에 동시출연계약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출연하기까지 제작진은 한달을 기다려야 했다. 이것은 제작진을 지치게 하기 때문에 그는 하루 24시간을 셋으로 쪼개어 세곳의 촬영장을 맴돌면서 잠은 옮기는 동안 잠시 눈을 붙이고 촬영현장에서는 늘 수면부족상태에서 연기를 했다. 때로는 먼저 작품의 대사를 중얼거려 스탭들을 웃기기도 했다.

유현목 / 영화감독 1925년생 <오발탄><막차로 온 손님들>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