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진짜 싸움 상대는 비평가도 아니고 자본가도 아니고 관객의 무관심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작가라는 것 자체는 좋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작가인가. -앙드레 바쟁
감독과 평론가. 어쩌면 숙명적인 견원지간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영화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한 고향 친구들인 셈이다. 때때로 서로가 헤게모니를 쥐려고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영화는 감독의 것도, 평론가의 것도 아닌 영화 그 자체가 주인인 것이다. 영화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그 자신이 하나의 생명체이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간다. 그 탄생이 열광적인 박수 속의 축복이든, 만인의 손가락질과 저주이든 분명한 건 영화는 감독과 평론가가 사라진 다음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볼 것이고, 새롭게 발굴될 것이고, 되살아날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영화에 대한 식견으로, 평생을 영화 속에 파묻혀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전업 평론가들에게 과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우문일지언정 감독으로서, 또 독자로서 늘 궁금했던 질문들을 하고 또 답을 들으니 후련하긴 하다. 언제나 선고장을 내려 읽는 무뚝뚝한 판관 같기만 하던 그들과 직접 옥수수를 까먹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며 진이 빠지도록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타인의 삶> 같던 그들이 왠지 좀 가까워진 듯 느껴지지만 그렇게 쉽게 ‘그들도 인간이었네’ 식은 위험하다는 예비 엄마 평론가의 말을 되새기며, 인터뷰를 했던 다른 한분의 글로 이 과욕이 넘쳤던 인터뷰를 마감하려 한다.
우리는 마치 천황 앞에 늘어선 대신들 같았다. 첫 번째 질문은 그의 다음 영화인 <꿈>에 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롭지만 저음이었다. 조용하게 질문이 오고갔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오마주와 그에 관한 살아 있는 긍정처럼 보였다. 그걸 참지 못하고 (철없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질문했다. “<라쇼몽>이 아시아영화로서 처음 서방세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것은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아시아영화에 대한 헛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나는 질문을 던져놓고서야 아차,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돌아보았으며 <카이에>의 조엘 마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구로사와는 선글라스 너머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대답했다.
“난 그 상을 갑자기 받았지요. 이상하지요? 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상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구로사와는 나에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ともだち)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사는 어른처럼 철없는 어린 나에게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격려라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그 의사소통의 의미를 새롭게 일러주었다.
1989년 서른살의 나이로 도쿄영화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만났던 정성일이 1998년 감독의 죽음에 부쳐 월간 <키노>에 쓴 추모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