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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의 CF] 여자가 정말 보여? 어디?

속물적 계급 상승의 욕망 자극하는 프리미엄형 아파트 광고들

지중해의 어느 별장에 달린 조명을 그대로 찍어 카피해다가 집 천장에 달아놓고 우아한 미소를 짓는 CF를 보면 여자가 보인다는데, 여자가 보입디까?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어쩐 일인지 나는 전혀 안 보이던데. 뭐, 지중해 별장으로 여행 다니며 피부에 기미 하나 없는 김희애씨가 부럽긴 합니다만.

이 아파트 브랜드 광고라는 것은 전세계 어디를 봐도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사례로 부동산 열풍에 주거공간마저 브랜드가 있어야 안심하는 행태를 그대로 반영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덕분에 광고시장은 덕을 좀 보고 있기도 하다. 어찌나 경쟁이 치열하신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파트 광고들을 보고 있자면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파크빌’이라는 대충 지은 이름의 손바닥만한 다세대 주택에 사는 내게는 특히 요즘의 아파트 광고들이 ‘너는 싸구려야, 너는 궁상맞아, 너는 가난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사실이잖아!’라고 손가락질한다면 뭐, 할 말은 없다).

최근 아파트 광고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프리미엄형’고 하나는 ‘자연주의형’이다. 프리미엄 부르짖다 이제는 ‘불륜 아침 드라마형’을 새로이 개척하는 래미안 같은 광고도 물론 있긴 하다. 이중 특히 나를 자극하는 것은 프리미엄형 아파트 광고인데 ‘자*’, ‘푸**오’, ‘어*림’, ‘롯데*슬’, ‘피*레’ 등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는 건설회사의 아파트 광고들이 이쪽에 속한다. 이 광고들은 보통 세 가지의 필수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미용실에서 이제 막 나온 헤어스타일의 잘 차려 입은 유명 여자 연예인이 코를 천장까지 쳐들고 새침한 표정으로 온갖 우아를 떨며 나온다. 명품, 프리미엄, 프레스티지 등의 내용은 없지만 괜히 번쩍거리는, 업계용어로 새가 백 마리 날아가는 카피가 나온다. 백인 혹은 외국, 특히 유럽이나 뉴욕이 등장한다.

서로 우리가 최고라고 얘기하고 있긴 한데 다 똑같아서 구분조차 안 가는 이런 아파트 광고들이 그려내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밥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실크 드레스에 조막만한 클러치백을 들고 턱을 치켜드는 김남주를 보고 있으면 이민가방만큼 큰 가방에 서류다 뭐다 이것저것 쑤셔넣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내가 너무 초라하다. 비싸게 굴어야 여자라며 두손 멀쩡한데 차문 열어줄 때까지 도도하게 기다리는 엄지원을 보고 있자니 내 발로 버스 타고 다니는 나는 싸구려인가 생각된다. 이제는 광고에 금칠을 하다하다 못해 하늘에 기구까지 띄우고 위에서 뭇 서민들을 내려다보시는 장진영의 시선 아래로 캐슬 근처에도 못 가보고 ‘빌’에 사는 나는 이번달 가스비에 머리를 싸매며 빌빌거리지. 명품을 넘어 프레스티지라는 이영애의 미소는 이제까지 명품이라고는 매장 직원의 눈총을 받으며 들여다만 봤지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안드로메다 저 멀리 있는 무엇 같다. 언니, 차라리 차가운 눈으로 ‘너나 잘하세요’를 날려주세요. 아아, 역시 로또만이 살길인가. 아이고, 끝이 없구려 그려.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그토록 ‘속물적이고 얄팍한 사치’를 부리는 것이 진정 우리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여자의 모습이라면, 아우, 나는 그냥 아파트에 안 살고 말래요. 이대로 추리닝에 쓰레빠(절대 슬리퍼 아님) 걸치면서 편안하게 살련다. 그렇게 마네킹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게 정말 여자들이 추구하는 속내라고? 정말로?

결과적으로 이 광고들이 하는 얘기는 하나다. “우리 아파트 비싸. 돈 될 거야. 부러움 받으며 잘난 척하고 살 수 있어.”

그래요, 저도 알아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사람 냄새 나는 주거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까지 붙여가며 팔고 사서 이문을 남겨야 하는 졸부 재테크의 수단이라는 것.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집이 계급의 척도라도 되는 양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며 잘난 척하는 여자의 모습이 진짜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그런 모습인 듯 포장하는 광고는 그만 봤으면 좋겠다. 여자가 보이는 게 아니라 돈자랑하는 속물만 보인다고. 나는 거기에 끼기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