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모 대학교 캠퍼스에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이라서 ‘놀러 간다’는 일이 찜찜했지만, ‘놀 땐 놀고’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공연장을 향했다. 공연장은 ‘놀고 있는’ 젊은애들로 득시글거려서 ‘인디’나 ‘언더’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유명 브랜드로 정착한 기업에서 주최한 행사답게 무대도, 음악인도, 청중도 세련되어 보였다. ‘아, 이제 드디어 인디음악도 제대로 된 비즈니스 시스템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구나’라는 섣부른 예상과 ‘아냐 이건 어쩌면 또 하나의 상업화일지 몰라’라는 옹색한 반발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동안 인디음악을 ‘운동의 대의’에 무리하게 동참시키려고 하거나, ‘인디는 비즈니스와 타협하면 안 된다’고 맨땅에 헤딩을 계속시키는 단계가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왈가왈부는 ‘인디 커뮤니티’ 내부의 이야기이므로 이 지면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인디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이다. 나 같은 사람의 눈에 그날 모인 청중을 포함한 인디음악 청중은 정치적 성향을 논하기 이전에 정치라는 주제 자체에 무관심해 보인다. 이를 두고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소통의 곤란을 주관적 억측으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무언가 생각의 코드가 달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는 문화적 세련됨과 정치적 올바름은 영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쩌다가 문화적으로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급진적 정치사상을 신봉하는 젊은 친구들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세련됨의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취급한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른 무엇이든 급진적 사상을 실천하는 삶이 문화적 욕구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이걸 부정할 수 있을까?), 지금 그걸 기꺼이 수용할 사람이 젊은 세대 중에 얼마나 있을까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펑크 밴드에 열광하는 것과 <엽기적인 그녀>에 열광하는 것이 과연 뭐가 다를까’라는 우문을 던지게 된다. 현답은 그들 스스로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한 가지 주제가 더 있다. 그건 한국에서 문화적 세련됨을 추구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영미 문화의 추종’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관련된다(따지고 보면 정치적 올바름이란 것 대부분도 ‘서양 급진사상의 추종’으로 출발한다). 그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라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최근 세계정세는 이런 ‘피곤함’을 가중시킬 것 같다. 20년 전에 그랬듯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과 ‘앵글로의 침략적 전통’이 여실히 나타나는 이때, 문화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여지는 협소해질 것 같다. 물론 ‘미국인과 앵글로족은 다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문화적 실천에는 심리적 제약이 많아지고 때로는 곤욕스러운 일도 발생할 것 같다. 그건 1990년대 시대정신(?)이었던 ‘니 멋대로 해라’는 에토스가 시효만료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된 정치적 신념을 재확인하면서 ‘재미를 희생하면서 의미를 추구하라’고 요구하기도 힘들 것 같다. 오히려 문화적 세련됨을 추구하는 실천 속에 숨겨진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 견해를 밝히자면 문화적 세련됨과 정치적 올바름이 찰떡처럼 접속될 것이라는 무리한 기대는 버리기로 했다. 그 대신 ‘두개의 지향이 서로 적대시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고 그럭저럭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갖기로 했다. 만약 국산(國産) 인디음악이 ‘영미 문화의 맹목적 추종’이자 ‘문화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면 나라도 나서서 반대하겠지만, 만약 영미 문화의 추종을 신성한 사명처럼 생각하는 실천이 보인다면 그것들과는 거리를 두어야겠다. 그렇다고 해서 20년 전 이맘때처럼 ‘관제 축제’에 출연한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저지하기 위해 계란과 짱돌을 던지겠다는 일은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지만. 우스운가. 그땐 그랬다. 앞으로는 어떨지….
신현준/ 문화수필가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