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에너지의 화수분_ 최민식
<올드보이>와 최민식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올드보이>는 최민식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충만한 에너지를 무제한으로 수용해내면서도 이를 영화의 힘으로 전환시킨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독특한 작품의 색깔보다도 작업해나가는 과정에서 영화를 더욱 새롭게 만들어가는 박찬욱 감독의 능력에 경탄하게 한 영화다.” 결국 <올드보이>에 대한 최민식의 생각은 박찬욱 감독에게 귀결된다. <올드보이>가 최민식에게 부여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그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작업이라는 점이다. 빡빡한 촬영일정 속에서 거의 매 장면에 출연했던 그의 정신은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있었지만, 육체는 탈진 상태였다. “우리 스탭 모두가 고생했지만, 나 또한 펜트하우스를 찍을 땐 감독의 ‘레디, 액션’ 소리를 듣고도 잠을 잤을 정도다.”
최민식은 복수 3부작 중 유일하게 두편에서 조연급 이상으로 출연한 배우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의 준비 소식을 듣고 박 감독에게 ‘작아도 좋으니 도와줄 일이 없겠냐’고 먼저 제안했고, 결국 백 선생 역할을 맡았다. “박 감독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많은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거라 생각했고, 결국 그 예상은 맞았다.”
압도적인 배움의 기억_ 강혜정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특유의 고집이 어린 그의 낯선 얼굴에서 관객은 20대 한국 여배우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미도 역에 임할 때의 강혜정의 머릿속엔 “내가 이 영화에 누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예쁘지도, 몸매가 좋지도, 연기력을 검증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믿을 건 내가 앞으로 보여줄 것밖에 없었다.” 최민식과의 공연은 지금도 그의 뇌리에 압도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알았다. 가르침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내가 스스로 느끼게 해서 끌고 가는 거다. 본인의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래서 그는 <올드보이>를 일컬어 “아버지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3부작의 인물들 중 가장 해보고 싶은 역할로 강혜정은 <친절한 금자씨>의 제니를 꼽았다. “‘미안하다는 말 다섯번을 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제니의 대사가 좋았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내가 듣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깊이 물어보진 말아달라며 말을 줄인 강혜정은 “원래 분노를 가진 영화들을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강인한 외모 뒤에 어떤 상처를 삼키고 있는 걸까. 정신지체 여성을 연기한 <허브> 이후 한동안 한가했다는 그는 5월 방영되는 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을 찾는다.
최민식 인터뷰
“나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박찬욱 감독의 표정도 기억에 남는다”
-<올드보이> 이후 뭔가 연기가 업그레이드됐다는 느낌을 받았나. =누구를 만나서 작업하냐에 따라서 뭔가 달라지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뭔가 당장 확연히 나타나는 건 아니다. 연기를 옷에 비유하면 보세 기성복을 입다가 갑자기 명품옷을 입은 느낌은 아니란 말이다. 어느 순간에 가서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면서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것일 수는 있다. 옷을 바꿔입듯 바로 표는 안 나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내적인 변화가 보여지지 않겠나.
-<올드보이>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 아, 장도리신은 빼고. =장도리신? 그게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굉장히 재밌는 경험이긴 했다. 그리고 나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박찬욱 감독의 표정도 기억에 남는다. (웃음) 박 감독을 놀부라고 불렀던 게 그때부터였던가? 그땐 정말 놀부같이 보였으니까. (웃음) 기억나는 장면이라기보다 마지막 장면 촬영을 위해 뉴질랜드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그 설원, 겨울 속 마지막 장면에 굉장히 의미를 뒀었다. 천형을 안고 그 형극의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데… 차라리 죽었으면 몰라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심정 때문에. 그래서 정말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미도가 마지막에 ‘아저씨 사랑해요’라고 하는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별별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어떤 생각을 했나. =게오르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서니 퀸 아저씨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을 끌어올리려 했다. 앤서니 퀸의 울지도, 웃지도 않는 묘한 표정, 그 비슷한 것을 나보고 하라는 것 같은데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리고 항공사에서 실수를 해서 카메라 박스와 내 의상가방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래서 뉴질랜드 현지팀의 의상을 빌려 입어야만 했다. 좌우간 그런 일들이 집중력을 방해했다. 하여간 어떤 표정… 사실, 그런 표정이 거울을 보고 만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형극의 세월을 살아가야만 하는 아버지의 심정,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묻는 것에 충실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백 선생 역할로 출연했다. 너무 심한 악역이라는 생각은 안 했나. =아니. 그보다 백 선생이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졌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게 이건 금자씨 이야기잖나. 백 선생은 금자의 그 행위와 인생 자체의 원인을 제공하는, 그야말로 절대악이잖나.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금자씨의 영화니까.
-그때는 홍보활동도 일절 하지 않았다. =홍보를 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이 영화의 초점이 박찬욱 감독과 이영애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내가 끼면 그야말로 사족이다. 그 두 사람을 돋보이게 해줘야 했다.
-<필로우맨>이라는 연극을 곧 시작하는데, 그동안 너무 쉰 것 아닌가. =<꽃피는 봄이 오면> 이후 꼬박 2년을 놀았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랫동안 공백을 가졌던 것 같다. 사실 좋았다. 여행도 다니고 집사람과 가정생활도 하고. 지인이나 친구도 만나고 가족도 챙기고. 형이 화가인데 지난해 개인전을 돕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면서 책도 보고 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그렇게 한번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굉장히 의욕적이다.
-왜 그리 오랫동안 쉬었나.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잖나. 외적 요인도 있었지만, 결국 내 내부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적으로 가다듬고 추스르는 일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알다시피 지난해엔 아예 시나리오를 보지 않았다. 하긴 최민식이 2006년 장사를 아예 접었다는 소문도 났다고 하더라. (웃음) 그러다가 거의 지난해 말부터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때부터 슬슬 할 일을 찾았다.
-<필로우맨>은 어떤 작품인가. =독특한 작품이다. 영국에서 초연된 작품인데, 한 소설가가 자기가 쓴 작품과 비슷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취조받는 게 내용이다. 나는 여기서 소설가 카투리안 역을 맡는다. 그런데 문제는 대사가 엄청나다. 물론 무대디자인도 훌륭해서 미국에선 상도 받고 했지만, 그런데 배우의 대사에 많이 의존하는, 배우의 현란한 화술이 아주 필수적인 연극이다. 이야기가 두개의 취조실을 오가면서 진행되는 탓에 순전히 입으로 떠드는 거다. 게다가 내 대사가 엄청나다. 혼자서 2장을 넘겨가며 대사를 읊는 게 기본이고, 1막 2장 같은 경우는 아예 혼자 등장해서 혼자 떠든다. (웃음)
-영화는. =시나리오를 몇개 놓고 고민하고 있다. 특별히 어떤 장르를 고집하는 건 아니고 규모가 크든 작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을 찾는 중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상반기가 다 지날 것이고, 하반기 중에는 영화를 꼭 한편 하고 싶다.
-<씨네21>이 창간 12주년을 맞았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전문지로서의 공로를 영화인으로서 고맙게 생각한다. 한 가지 지적한다면, 감독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성숙된 모습으로 지면을 할애하는데, 배우에 대한 비평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지금 <씨네21>의 배우에 대한 기사는 너무나 잘 포장된 선물꾸러기 같은 느낌이다. 너무 과격한 표현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배우를 잡지의 내레이터 모델로 사용한다는 느낌이다. 커버스토리나 스포트라이트 같은 지면에 등장한 배우들은 다 기대주고 다 그럴듯한 배우인데, 그런 것을 보면 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제대로 된 배우 비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