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거짓된 세상이 보이네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의 박형서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음란소설이다? 소설 속 핵심 키워드로 등장하는 달걀은 수태와 생명의 상징이며, 이는 곧 성(性)으로 이어진다. 옥희가 아저씨에게 달걀을 건네받는 행위는 남성의 단백질을 신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성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박형서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지는 학술 논문의 형식을 취해 온갖 이론과 각주, 도표를 동원해가며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성교를 중심으로 한 알레고리 소설”임을 능청스레 입증한다. 궤변이 좀 심하다고? 그렇다면 <두유전쟁>은 어떤가. 두피에서 하루에 200만 배럴의 머릿기름을 생산하는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 정부는 피 튀기는 첩보전을 펼친다.
박형서의 소설집 <자정의 픽션>은 출간과 동시에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 “원조 개그 소설” 등의 수식어를 얻었다. 말 그대로 뒤끝없이 웃기는 소설이라는 평이 주를 이뤘지만, 혼몽의 사막을 펼쳐 보였던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의 서늘한 감수성을 눈여겨보았던 이라면 포복절도의 웃음 사이 묻어나는 쌉쌀한 뒷맛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많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예전이 날것 그대로였다면, 이번엔 당의정을 씌웠다고 해야 하나. (웃음)”
박형서의 당의정은 그래서 단순히 달콤한 수사적 유희에 머무르지 않는다. 경계없이 뻗어나가는 상상력은 흔히 허구의 세계를 경유해 현실을 겨냥하고, 통렬한 유머는 종종 웃음을 통해 은폐된 거짓을 누설한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가 학술 논문의 편협하고 자의적인 해석과 허울 좋은 탁상공론을 통렬하게 조롱한다면, 두 지식인이 오로지 “지지 않기 위해” 온갖 치졸한 수단을 동원하는 <논쟁의 기술>은 먹물 세계의 속물성을 노골적으로 희화화한다. 망자들의 길이 발견되고 소멸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노란 육교>는 죽음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우화적으로 포착했고, “진실을 생산해내는 공장”을 등장시킨 <진실의 방>은 고문과 자백의 형식을 빌려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회의한다. “젊은 작가들이 흔히 현실의 중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하는데, 그건 사실상 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느냐, 하는 말과 같다. 예컨대 이솝이 이야기를 쓸 때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 건가? 그렇지 않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다.”
무엇보다 박형서를 매혹하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 자체가 선사하는, 서사 장르 본연의 쾌감이다. <두유전쟁> <날개> 등 전생과 현생, 과거와 현재를 마음껏 넘나드는 그의 화폭에는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궁금해 마음을 졸이게 되는 순수한 설렘과 즐거움이 존재한다. “소설은 이야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의 하위 장르라고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했지만,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소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소설이 가졌던 권력을 그리워할 뿐이다. 화려한 부귀영화는 사라졌지만, 소설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자정의 픽션>이라는 소설집의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하루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기도 한 자정. 박형서의 이야기는 소설이 “이른바 선지자의 역할을 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자, “서사문학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근대 이전”의 시간, 그 경계 위에 자신을 세운다.
소년 시절 글짓기 대회 1등상을 받으며 ‘내가 이걸 잘하나보다’라는 생각에 막연히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고,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황홀함”에 사로잡혀 글쓰기를 결심했다는 박형서는 이제 자신의 첫 장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이틀 만에 단편 하나를 몰아 쓰는 스타일이라 근심이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데, 장편을 과연 잘 쓸 수 있을지.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릴 걸로 예상하는데, 그동안은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웃음)”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10년 뒤에도 그 고민을 고스란히 안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표정엔 은근한 재치와 여유가 배어나온다. “뭐, 그래도 그때는 책이 좀더 잘 팔리지 않을까? (웃음) 다들 위기라는데 나는 왜 이리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지. (웃음)”
판타지, 뮤지컬, SF 또는 우디 앨런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의 이기호
그의 소설은 지상에 바짝 엎드린 판타지영화 같다. <백미러 사나이>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것에 화가 난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뒤통수에 구멍이 생긴 사내 이야기다. 문제는 그 구멍이 점차 박정희의 눈에 잠식당하면서 앞보다 뒤를 더 잘 보게 되고, 그 덕에 비극적인 시대를 희극적으로 종단하게 된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에는 1983년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장교 때문에 발령된 공습경보로 지하벙커에 숨은 뒤 흙만 파먹으며 흙의 맛에 도취돼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현실의 심각한 아이러니를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풀어헤친다.
“두 소설 모두 정치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판타지다. 현실에 바탕하지 않은 판타지, 그러니까 내적 리얼리티가 없는 판타지는 공허하다. 이걸 만족시켜주는 게 역사 아니면 정치다. 판타지적인 게 먼저 떠오르고 내적 필연성과 현실성을 주다보니 정치성이 투영된다.”
그의 소설은 유머감각을 메타비평으로 슬쩍 바꿔놓는 우디 앨런의 영화 같다. <햄릿 포에버>는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쏴라>를 떠올리게 한다. 본드를 불어 환각 상태에서 ‘의식의 신세계’를 만난 양아치가 수렁에 빠진 연극 <햄릿>의 연출을 구원한다.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 극악해 보이던 마피아가 좌초 위기에 빠진 연극의 대본 작업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면서 작가주의 비슷한 업적을 이루던 모양과 닮았다. 창작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 뭉개면서도 창작의 지위를 유머로 고양하는 솜씨가 닮은 것이다.
“소설은 인문학의 한 갈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작가는 철학적 사유를 담아 소설을 써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런데 소설가가 철학을 신경쓰면서 쓰면 그게 소설이 될까 고민스러웠다. 더 중요한 건 혹시 감각은 아닐까 싶었다. 그 감각을 끝까지 치고 가면 저절로 철학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철학가가 아닌 예술가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감각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게 뭘까 찾다가 본드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은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져가는 뮤지컬영화 같다. 10대 보도방 포주가 화자인 <버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랩으로 불린다. 그 운율에 서사가 훼방받는 건 아니다. 신내림받듯 어느 순간 맹신도가 된 소녀가 화자인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스러운 문투로 긴 찬송가처럼 쓰여졌다. 이런 형식 파괴 때문에 간혹 개그 같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두 주인공을 기존의 내 문장으로 쓰는 건 비겁하다는 느낌이 컸다. 한번 걸러졌다는 느낌이었다. 내 소설의 형식은 주인공의 목소리에 어떻게 다가갈지의 문제다. 전통적인 문장 형식을 많이 배웠고, 그게 훨씬 편안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갑갑할 때 자연스레 파괴되는 듯하다. 목표와 의지가 형식에 있지는 않다.”
그의 소설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펼치는 SF영화 같다. <수인>의 주인공인 소설가는 원자력 사고로 나라가 잿더미로 화한 것도 모르고 산속에 처박혀 소설만 쓰다가 뒤늦게 해외로 ‘탈출 이주’를 하기 위해 유엔의 심판을 받는다. 심판관은 프랑스 이주를 원하는 그에게 교보문고에 있다는 첫 소설을 구해오라고 하고, 그는 두터운 시멘트로 봉인된 그 입구에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이 소설 역시 유머, 메타성, 정치성, 판타지 등 예의 기법이 화려하게 구사되는데 눈에 두드러지는 건 주인공인 소설가의 미래가 대단히 암울하다는 점이다. “굉장히 비관적인 (소설의) 현실을 끌어안고 같이 쓰러지겠다는 결말인데 쓰던 당시의 내면 풍경과 닮았다.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 문학이 대중문학으로 변해 없어지고 있다고 쓴 글을 보고 착잡했을 때였다. 소설가가 예전부터 수인인 것 맞다. 내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데 더 본질로 돌아가자, 더 근원으로 다가가자는 심정이다.”
죽은 소설가 이광수를 부활시켜 쓰고 있는 그의 첫 장편 역시 예의 기법과 문제의식이 총동원될 것이다. “정사가 아닌 야사의 문법으로 쓰고 있다. 당연히 판타지가 끼어들지만 주인공들에겐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눈에 드러나거나 문법화된 것의 이면을 들여다보자는 거다. 이광수가 내게 온 것은 그가 근대의 시발에서 선구자적 존재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근대가 뭔지 그 이면을 보고 싶다. 내 눈에 우리 주위에는 전근대적인 게 아직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