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둘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전시회나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찜질방도 남자 둘은 찾기 어렵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공원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더욱 보기 어렵다. 여자 둘은 이보다 한결 유연하다. 두 여자가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건 일상적이다. 왜 그런가? 혹자는 남성은 원래 목적 지향적이고 여성은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남성이 둘이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풍경은 유사해야 한다. 과연 그런가? 와인 한병을 시켜놓고 서넛 시간을 노닥거리는 파리의 두 남자. 그들에겐 술은 대화의 안주이다. 반면 같은 시간을 버티려면 최소한 소주 두어병을 비워야 하는 서울의 두 남자. 그들에게 대화는 술안주이다. 분명 차이가 있다.
‘남자 둘’의 관계는 한 사회의 사적 소통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적 성격이 있다. 남녀관계는 성적 관심, 여자 둘의 관계는 피지배자의 연대감이 개입한다. 하지만 원래가 경쟁적이라는 ‘남자 둘’의 관계는 그런 변수가 없기 때문에 개인적 소통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로서 훨씬 예민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 특히 서로 모르는 성인 남자 둘의 관계, 예컨대 우연히 바에서 옆자리에 앉은 두 남자의 관계는 개인적 소통의 정도를 가늠하는 확실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나는 소설이건 영화 속이건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 설정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남자 둘’의 풍경은 사회적 관계로 얽힌 두 남자가 ‘업무’ 얘기나 정치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 남자들은 단둘이 마주하는 걸 유난히 불편해 한다. 그건 사적 소통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술자리는 셋 이상이고, 그나마 주로 업무로 맺은 사람들끼리 모인다. 일의 긴장과 권력 관계는 고스란히 유지된다. 상사를 중심으로 발언권이 분배되고, 같은 주종의 술잔이 개인의 주량과 무관하게 동일한 횟수로 돌아간다. 업무상의 긴장을 순식간에 풀어놓기 위해 다량의 알코올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술잔을 거부하거나 중간에 자리를 뜨면 단합을 방해하는 직무유기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마음도 약하고 주량도 약하면 괜한 미안함을 느껴야 한다. 이 술자리 풍경의 본질은 직장의 직급이라는 생산 영역의 역할이 권력화되어 개인의 사적 생활까지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더 서글픈 것은 이 사태를 초래하는 주체가 술자리의 좌장 격인 모모한 인격체가 아니라 그 등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점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술자리 체험 하나!
한동안 뜸했던 것이 허전했던지 부장이 한마디 한다. “저녁에 한잔할까? 어제 폭탄 돌렸는데 간단하게 한잔만 하지.” 부원들이 곁눈질을 하며 눈치를 살피다 그중 하나가 “그러죠”라고 바람을 잡자 다들 한마디씩 거든다. 이렇게 성립된 술자리에 앉은 대여섯명의 남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마지못해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대화는 툭툭 끊어지고…. 침묵의 불편함을 지우기 위해 빠른 속도로 폭탄주가 돌고…. 그러다 양줏병이 바닥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도 원치 않았던, 제안자조차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던 기묘한 술자리. 나는 이날 내가 술을 마신 건지 ‘보이지 않는 손’이 음주기계에 술을 갖다부은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국 성인 남자는 여가의 절반을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술을 깨우는 데 사용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술꾼들을 우스운 남자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의 몸통은 이런 게 아닐까? 사적 공간에 혼자 있을 때 느끼는 배척의 불안, 술이 취해서 망가져야 비로소 정을 느끼는 퇴행적 온정주의, 그 동전의 뒷면에 아로새겨진 합리적 삶에 대한 집단적 피해의식! 이 심리상태는 매 맞고 자란 미성숙한 소년의 내면 풍경이다. 상처로 연대하고 위계로 조직하며 폭력으로 표현하는 사나운 노예근성의 세계! 우리는 참 힘들게 일하듯 술 마신다. 연애하듯 가볍고 퇴폐적으로 술 마실 순 없는 걸까? 사적 개인의 자격으로만 술자리에 앉을 순 없는 걸까? 국민 복지를 위해 진정으로 ‘FTA 당해야’ 할 것은 알코올로 연대를 이어가려는 이 소아병적 남성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