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마르 베리만은 두 번째 자서전에서 자신의 1940년대 영화들을 단순히 ‘초기 영화들’로 분류했다. 그가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참여한 영화들이 (이후 영화들에 주어진) ‘꿈의 영화, 어릿광대의 영화, 신앙과 이단의 영화, 웃음과 기쁨의 영화’ 같은 근사한 이름을 얻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베리만은 초기 영화에 (애정을 느낄지언정) 만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심지어 <환희에 부쳐>같이 사랑스런 영화를 ‘구제불능의 멜로드라마’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베리만의 초기작에는, 그의 영화에 드리운 선입견들- 철학적인 주제, 무겁고 딱딱한 양식, 죽음과 침묵의 어두운 세계- 을 무색하게 만드는 담백함과 영롱함이 있다. 순수와 이상을 동경하고, 삶의 의지와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 영화의 얼굴 사이로 베리만이 막 떠나보낸 청춘의 흔적이 남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고뇌>(Hets, 1944)는 베리만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의 첫 만남으로서, 스웨덴의 대감독 알프 시에베리가 연출을 맡아 그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베리만이 학교와 청춘 시절의 고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라 했던 <고뇌>는 엄한 아버지, 가학적인 선생, 첫사랑 사이에서 길을 잃은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껴안는다. 베리만의 데뷔작 <위기>(Kris, 1946)는 18살 소녀가 자기를 버린 엄마를 따라 도시에 갔다 상처만 입은 뒤 자기를 키운 여인을 찾아 시골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지옥 같은 현장과 흥행의 참패로 베리만에게 상처만 입힌 영화였지만, 베리만이 생각했던 선의 개념과 인간에 대한 염려를 엿볼 수 있다. 부모의 불화와 감화원 생활 그리고 남자들과의 과거 때문에 자살을 기도한 소녀가 우연히 만난 전직 선원과 함께 사랑과 미래를 꿈꾼다는 이야기인 <기항지>(Hamnstad, 1948, 사진1)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네오리얼리즘영화가 당시 베리만에게 끼친 영향이 반영된 작품이며, 베리만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플래시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가지 이상한 사랑>으로도 알려진 <갈증>(Torst, 1949, 사진2)은 4개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 그리고 기억, 시간, 꿈을 연결하고 있는데, 층층이 쌓인 시간과 복수의 플롯, 결혼과 애정관계가 안겨주는 고통의 기록이란 점에서 베리만의 이후 작품을 특징짓는 요소들이 감지된다. 베리만 스타일의 시작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제목을 따온 <환희에 부쳐>(Till Gladje, 1949)는 남자와 여자가 겪는 우여곡절과 부부로서의 행복과 이별을 적절한 유머와 서정적인 영상, 친숙한 고전음악 속에 담아낸다. 베리만의 두 번째 결혼이 남긴 상처와 갈등이 자리한 이 영화에는 베리만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빅토르 시에스트렘(사진3)이 <산딸기> 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출연해 미소를 안겨준다. 첫 영화 <위기>의 시작 부분에 “일상의 드라마와 코미디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내레이션을 깔아놓았던 베리만은 한동안 그 약속을 지켰으며, 초기 영화의 주인공들인 십대 혹은 스무살을 갓 넘긴 여자와 남자가 현실의 각박함과 고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낙관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존의 영화와 다르게 들려주는 것이었으니, 여기서 유럽 뉴웨이브영화의 이른 기운이 느껴진다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잉마르 베리만 초기작품집>은 예술영화의 홈비디오 제작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낸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이 새롭게 시도하는 ‘이클립스 시리즈’의 첫 출시작이다. 기존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화려한 부록을 없앤 대신 가격을 상대적으로 낮춘 염가판임에도 감독별로 영화를 묶어 작품집의 격을 갖추는 걸 잊지 않은 이 시리즈의 리스트에는 <루이 말 다큐멘터리 작품집>과 <오즈 야스지로 후기 작품집>이 향후 포함될 예정이다. <잉마르 베리만 초기 작품집>에는 예상했던 대로 어떤 부록도 없으며, 본편 영상 또한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완벽한 DVD에 익숙했던 사람이라면 간혹 보이는 스크래치(사진4)와 썰렁한 메뉴(사진5)가 어색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크라이테리언 컬렉션과 스웨덴의 스벤스크영화사와의 계약 작품만 수록된 결과, 다른 회사에서 제작된 베리만의 초기작 <우리의 사랑에 비가 내린다> <인도로 가는 배> <어둠 속의 음악> <감옥>은 실리지 못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