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4월22일(일) 오후 2시
알렝 레네의 <집에 가고 싶어>는 내용이나 형식적으로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의 한 인물이 “삶은 강인함, 아이러니, 냉소 중의 하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 영화가 고수하는 시각을 함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프랑스 속 타자들인 두 미국인에게 맞춰져 있다. 알렝 레네는 이들을 통해 단순한 여행기나 타국에의 적응기를 넘어서 미국과 프랑스 문화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집에 가고 싶어>는 미국 문화의 프랑스 문화에 대한 비평, 프랑스 문화의 미국 문화에 대한 비평을 양날로 가진다. 그렇다면 알렝 레네의 위치는? 그는 그저 양날의 칼을 쥔 자일 뿐,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엘시. 그녀는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녀는 한없이 들떠 있다. 2년 뒤. 그녀의 아버지이자 노년의 만화가인 조이 웰먼 역시 국제만화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그러나 그는 뉴욕 거리에서 재잘재잘 불평하는 우디 앨런처럼, 한없이 불안하고 불만 많은 노인의 형상이다. 2년이라는 시간 간격을 두고 타국으로 향하는 이 부녀의 모습은 대립된다. 엘시에게 애증의 대상인 아버지는 곧 미국 문화와 다름없다. 조이 웰먼에게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뿐더러 불어로 말을 거는 낯선 딸은 곧 프랑스 문화와 다름없다. 그런데 이후 그 둘의 행로가 흥미롭다. 엘시는 소르본대학에서 논문을 쓰고 있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고티에 교수는 그녀를 만나주지도 않는다.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다. 조이 웰먼은 오랜 시간 자국에서조차 잊혀진 만화가를 알아본 고티에 교수를 통해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집에 가고 싶어>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고티에 교수의 저택에서 열린 가장 무도회 파티다. 파티에 초대받은 조이 웰먼과 엘시, 그리고 몇몇 미국인들과 프랑스인들. 이들은 미국 만화 캐릭터로 분장한 채 교양을 떠는데, 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소동극은 두 문화에 대한 알렝 레네의 조롱과 냉소를 돋보이게 한다. 그 하루의 카오스 뒤, 아버지와 딸의 행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반대로 갈린다. 딸은 자신을 홀대하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고 아버지는 자신을 반겨주는 대중의 나라 프랑스에 남는다. 결국은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인정욕구의 문제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