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무력한 소시민이 이런 염려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영화 <타인의 삶>을 ‘자유의 소중함’으로 읽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이 영화의 주제를 자유라고 본다면, 아카데미가 환호할 만하다(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탔다). 물론, 나도 이 영화가 좋았다. 복잡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도드라진 감동은 두 가지. 삶을 사랑하는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 즉 모든 사람이 결국 원하는 것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심장의 박동(stroke)을 선사하는 타인의 존재다. 머무르지 않으려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리고 가택 수색 뒤 부서진 가구를 보상해주는 사회주의의 ‘위대함’!(이 영화의 동독 체제를, 감히 지난날 우리의 군부독재와 비교하지 말라).
한편, 이 영화는 내게 계급적 분노를 자극했다. 80년대 어떤 사람들은 체제의 탄압으로 창작의 자유를 억압당했다면, 현재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예술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자발적으로’ 할 수가 없다. 예전에 매일 지나다니던 육교에 걸린 조선일보사 명의의 플래카드,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20세기 자본주의-식민주의의 역사와 그 콤플렉스를 압축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노예사냥, 금은보화를 도둑질한 1차 지구화(제국주의, “산업화”)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은 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로 인한 거침없는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질주인 2차 지구화(제국, “정보화”)에 대한 분석이었다. 둘 다 서구 백인 남성의 근대화 프로젝트였고 또 그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른 분석틀이 필요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산업화” 시대에 비해 “정보화” 시대는 개인에게 ‘자발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차 지구화 때는 노예로 끌려왔던 사람들이 현재 지구화 시대에는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그것도 브로커에게 돈을 지불해가며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자유일까.
2007년, 세계는 영화 <타인의 삶>이 그렸던 감시 체계에서, 지역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자유로, 어떤 곳에서는 전쟁의 파괴와 공포로, 어떤 곳에서는 에이즈와 기아로 인한 죽음으로 그 풍경이 전환되고 있다. 영화는 당시 동독의 높은 자살률 원인이 마치 자유의 부재처럼 그려지고 또 해석되고 있지만, 지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인의 자살 원인은 (게임의 룰 자체도 엉망인) 살인적인 경쟁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렇다면, 자유없는 세계나, 자유는 있되 그 자유가 조건이 완전히 불평등한 경쟁과 일방의 예견된 승리를 통해서만 확보되는 ‘자유세계’나, 자살이 많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유, 선택, 동의와 같은 단어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주지만, 그런 언어가 판치는 세상은 백발백중 디스토피아다. 선택의 자유는 최소한 5개 이상의 선택지가 있을 때 그리고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의 조건이 평등할 때만 의미가 있는데, 이런 사회는 인류 역사상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죽을래? 맞을래?” 이런 양자택일에서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동의를 위장한 강제일 뿐이다. FTA. 말 그대로, 자유(free) 무역(trade) 동의(agreement) 체제다. 자동차는 자동차끼리, 쌀은 쌀끼리 나라마다 잘하는 애들끼리만 경쟁하자는 국가를 초월한 계급 연대다. 말하자면, 경쟁력있는 산업이 많은 미국을 위한 협정이다. 원래 근대 체제는 국내의 성별, 계급 등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을 국가간 경쟁에 의해 해소하려는 국제 질서를 의미하는데, 정말 ‘탈근대’ 시대가 오려나보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 자본을 위해 국가(주의)마저도 포기했다. 정말 FT‘A’가 자유무역‘동의’ 체제라면, 정부가 이를 체결했다고 해서 국회마저 이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자유에 대한 환상을 줄 우려가 다분하지만, 영화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이 곧 나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FTA는 타인의 삶, 타인의 생명이 나의 이윤 추구에 걸림돌이 된다는 논리인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이윤이라는 것이 이미 한쪽의 싹쓸이 상태라는 것이다. 얼마나 더 경쟁하고 무엇을 더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