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험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사자를 만나는 일보다 연예인의 ‘쌩얼’이나 지난달 휴대폰 요금 청구서를 보는 일이 더 충격적이다. 애인과의 데이트 같은 다이내믹한 경험조차 점점 형식이 간소해지고 있다. 고작해야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저녁 먹고 헤어지는 게 전부다. 이보다 더 욕심을 내 동물원에 놀러갈 수도 있겠지만 사자가 밥 먹고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나면 ‘차라리 DVD방에나 갈걸 그랬어’란 생각이 떠오르고 말 것이다. 무모한 경험, 즉 모험은 거의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자이로드롭이나 번지점프? 모험이 이렇게 안전할 수가 없다(물론 가끔 시민을 경악하게 하는 안전사고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놀 거리가 많은 시대에 경험할 만한 일이 이리도 없다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험이 부족한 것은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캐주얼 문학의 승리다. 캐주얼 문학에서 주인공들은 더이상 애정에 집착하여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박이나 간통을 하다 감옥에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그런 범죄자가 나오는 TV를 보다가 가까운 편의점에서 맥주와 콜라를 마시고, 친구와 카페에 가서 가벼운 연애소설에 대해 가벼운 토론을 벌인 다음 연인과 함께 침대로 들어간다. 그들은 부족한 경험에 대해 어떤 콤플렉스도 갖고 있지 않다. 독자 역시 간접경험을 위해 소설을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든 비행기를 타고 타히티로 떠날 수 있고, <반지의 제왕>을 보며 중간계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친구를 기다리는 따분한 시간을 견디거나 지하철에서 시선 처리하기 곤란할 때 복용하는 두통약쯤으로 전락한 것일까? 20대 중반인 동생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냐고. 흠… 그렇단다.
누군가가 내게 정장과 캐주얼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캐주얼을 고른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실 전통적인 문법의 소설을 싫어하고 그것에 대한 반기로서 캐주얼 문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경험없는 세대에게 현재의 경험에 안주하라는 것처럼 읽히는 캐주얼 문학에는 반대다. 유행에 시기적인 한계가 있듯이, 캐주얼 문학도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유사 현실이란 소재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접근했지만, 결국 그 친밀감 때문에 금방 식상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입맛은 까다롭다. 작품이 일상과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보자. 그 책은 (베스트셀러임에도) 앞서 말한 캐주얼 문학의 요소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즉 ‘사람들이 요새 어떤 트렌드를 따르고 있는가’에 관한 고민이 생략되어 있단 말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문학 도식을 따르려는 강박증과 작품 내적인 고민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나는 이 책이 잘 팔리는 이유가 (홍보 마케팅을 무시하자면) 특이한 소재와 탁월한 묘사 외에도 비일상적인 경험을 통한 대리 만족에 있다고 본다. 18세기 파리의 음침한 뒷골목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환상적인 거리감을 주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읽지 않는 것은 소설이 아니라 한국 소설이라고.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주요 타깃인 2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을 한국 소설가들이 써내지 못한 탓이며, 좀더 캐주얼한 문학을 하라고. 자신의 취향을 접고 대세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난 몇년간 언론들이 써낸 한국 소설 위기론의 표적은 대부분 소설가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 차라리 칙릿이든 팩션이든 상업적인 차원의 기획 소설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맞다. 모두가 경험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부족한 경험을 채워주는 여름날의 소다수 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논술 공부용 교재로만 쓰이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