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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영화평 ② 종교적 구원에서 사회적 연대로

김기덕 영화세계의 전환점을 예고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거의 다 봤지만 볼 때마다 한편의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는 인상을 받는다. 그건 그가 아주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집요하게 그 얘기를 하기 때문일 게다. 동시에 그 얘기가 세상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일 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기에 사람들은 좀체 그에게 귀를 내주지 않는 것일까?

내 개인적 경험을 얘기하면 이렇다. 나는 늘 김기덕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들과 적으로 배치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위치에 자신의 진지를 구축한다. 계급적으로, 개인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웬만한 인간은 동일시가 불가능한 지점까지 달아난다. 거기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즉 사회구조는 거대한 악의 구조물이고 나는 그 구조물의 일부로 자리매김된다. 다행인 건 이 악의 구조물과 맞서는 그의 전략이 사정거리 미달의 자살테러란 점이다. 그는 세계를 적으로 간주하지만 그 적에 대한 직접적 공격과 공격을 위한 연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그 적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징벌하면서 구원을 갈구하는 뜻밖의 착한 포즈를 취한다. 구원의 주인공으로는 성녀의 이미지를 한 여성이 주로 캐스팅된다. 그러니 남자는 물론이고 평범한 여성도 별로 해줄 게 없다. 김기덕 영화에서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관객은 가만 앉아서 거대한 악의 구조물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되는 불쾌함과 심하게 망가지는 한 인간을 지켜보는 불편함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 상황에서 허용되는 것은 외면과 먼 거리에서 적선하듯 던져주는 연민밖에 없다. 이 연민마저 공감을 통한 대상과의 연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인 것이다. 수잔 손택이 지적했듯이, 잔혹한 형벌의 대상에게 갖는 연민은 잔혹한 행위에 자신이 연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지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김기덕 영화의 절대 악과 비참함의 대립구도에서 사람들은 비참한 대상에 대한 연민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거기서는 아무런 개인적 공감도 사회적 연대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주로 이 지점에서 김기덕 영화를 생각한다. 그는 왜 그렇게 급진적 혁명가처럼 인식하고 절망한 불량소년처럼 행동하며 다 놓아버린 늙은 성직자처럼 몽상하는 것일까? 그의 영화가 욕망하는 것은 세계의 어둠에 대한 숭고한 고발일까 아니면 제 것이 아닌 듯한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일까? 내 생각에, 세계의 환부를 화면으로 들이밀어 관객을 내치면서 종교적 판타지를 몽상하는 것은 진정한 적대행위가 아니다. 적을 마주보면서 종교적 판타지를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온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에게 전하는 은밀한 투항의 포즈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온순한 아들이 될게요’라는 고해 말이다. 김기덕의 영화언어는 보상을 위한 협박의 어조를 협상 전략으로 종종 구사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정치성, 즉 전복의 진정성이 늘 미심쩍었다. 온전한 정치성은 인식과 행동이 조응해야 한다. 그의 경우 종교적 초월이 아닌 사회적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정치성은 사회적 환부에 대한 고발이라는 문제제기 수준에 정체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누구나 피해가려는 미지의 어둠을 비춰왔기 때문일 것이다.

<>을 보면서 김기덕 영화의 한 전환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일가족을 살해한 사형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죽음의 길을 인도하는 천사 같은 여자가 등장하지만 여자는 가정으로 돌아가고, 남는 것은 감옥 안의 죄수들뿐이다. 더는 여자를 통해 구원을 찾지 않고 더는 여자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구원은 서로 뒤엉킨 죄수들의 신체를 통해 온다. 나는 이 지점이 종교적 구원에서 사회적 연대로 전환하는 발아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시사철 추구했던 성녀를 통한 구원의 세계는 <>에서 농담조로 희화화하기까지 한다. 이 농담에는 ‘내가 저랬지’라고 자신을 관조하는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다. ‘처자를 죽였지만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형수의 몸’으로, ‘자신의 의지가 아닌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는 순간적인 죽음을 그는 욕망한다. 더는 나아갈 데 없는 파괴적 전복의 막장에서, 더는 기다릴 수 없는 또 다른 구원을 찾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은근슬쩍 난도질한 영화 <>. 그는 소란스러웠던 한 세계와 이제 작별을 고하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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