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를 구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내 주위의 사람들이다.” 디올 옴므의 수석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의 말이다.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와 부티크(Boutique), 런웨이(Runway)와 워킹이란 단어가 화려한 어감만을 던져주는 패션쇼. 봄에 가을을 이야기하고, 겨울에 여름을 맞이하는 이상한 계절감각의 컬렉션. 패션쇼의 런웨이는 평범한 키와 몸무게, 무난한 의상을 세일에 맞춰 구입하는 사람들에겐 이상할 만큼 좁고 긴 무대다. 비싸서 사입지도 못하지만, 공짜로 생겨도 입기엔 민망하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패션쇼의 친근함이 엿보인다. 에디 슬리먼의 말처럼 쇼의 화려함은 지극히 작고, 소소한 기억에서 시작된다. 쇼의 문턱도 그리 높지 않다. 올해로 34회를 맞은 서울컬렉션은 극장에서 영화 한편 볼 돈이면 당당하게 티켓을 끊고 들어가 체험할 수 있는 행사다. 의상이 궁금해서, 모델이 보고 싶어서, 연예인을 만나고 싶어서라도 좋다. 의상을 매개로 하나의 문화체험이 된 패션쇼. 따뜻한 봄바람이 찾아오기도 이전, 가을과 겨울을 조망하는 07/08 FW 서울컬렉션을 다녀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가 지휘했고, <섹스 & 시티>의 캐리가 넘어졌던 그곳. 멀지만은 않은 화려한 런웨이의 세계를 걸어보자.
패션쇼 그 이상의 쇼를 구현하는 런웨이
컬렉션 첫날, 남성복 브랜드 BON의 디자이너 한상혁 쇼. ‘Future Lab’이란 이름의 실험실이 런웨이 양옆으로 차려졌다.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bye bye Vespa’란 제목이 백(back) 스크린에 뜬다. <물이 되는 꿈>을 시작으로 루시드 폴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끈, 놓아버리면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한 모델들의 워킹이 시작된다. 주홍색, 보라색 등의 로프를 메인 아이템으로 해 소년, 청년, 중년의 삶을 이어간다. ‘0’, ‘1/2’, ‘1’이라고 각각 쓰여진 문(doorway)에서 연령대가 다른 세명의 모델들이 차례로 나오고 들어가며, ‘성장’을 주제로 한 쇼가 진행된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BON의 메인 모델인 주지훈이 피날레(Finale)를 장식한다. 객석에선 박수소리가 마지막 음악을 대신한다. 의상이 나이를 사유하고, 쇼가 시간을 음미하는 순간. 패션쇼는 하나의 매체가 되어 옷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음악, 무대, 조명, 의상, 모델. 패션쇼를 구성하는 다섯개의 요소들은 특정한 컨셉을 위해 일정한 배열을 주문받는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30분이 넘는 쇼를 위해 무대가 갖는 시간은 약 한달간. 의상을 입고 보여주는 단순한 의미의 패션쇼는 의상의 배열과 연출을 통해 연금술사의 꿈을 쫓거나(오은환 쇼), 일상과 판타지를 융합하고(곽현주 쇼), 엉뚱하고 저돌적인 젊음의 꿈을 4차원의 개성으로 변주(박혜린 쇼)한다. 따라서 런웨이는 쇼의 컨셉에 따라 일정 높이의 단상을 유지하거나, 평평한 나무바닥(지춘희 쇼)으로 변하고, 광택의 타일(장광효 쇼)로 옷을 갈아입는다. 모델들의 동선도 가장 기본적인 T자 런웨이의 직선부터 S자, M자 등 다양하다. 같은 T자에서도 모델이 그룹으로 등장할 때는 턴(Turn)하는 지점과 포즈를 취하는 위치가 다양하게 갈린다. 4월4일에 있었던 곽현주 쇼에서는 모델이 런웨이 밖에서 워킹을 했으며, 홍은주 쇼에서는 왼쪽으로 걸어들어가던 모델이 런웨이 중간에 방향을 바꿔 오른쪽에서 워킹을 마치기도 했다. 의상이 테마를 입고, 모델이 연기를 하며, 쇼가 쇼 이상의 퍼포먼스로 완성될 때, 패션은 순간 짧은 영화처럼 보인다.
M.VIO, BON, XESS 등의 브랜드로 참여한 개별 디자이너, 디자이너 관련 단체인 SFAA, KFDA, NWS가 함께 참여한 이번 서울컬렉션은 20cm의 단상을 기본 런웨이로 정했다. 변형을 원하는 디자이너는 1시간 내에 별도의 설치를 추가한다. 그렇게 완성된 런웨이를 모델이 걷는다. 관객에게 보이는 건 런웨이와 의상, 모델이 전부지만 쇼는 그 뒤에 긴장의 드라마를 숨겨놓는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고개가 돌아가는 동안 쇼장에선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도 수많은 신호와 동작들이 오간다. 무릎을 위로 깊게 차는 ‘계단워킹’과 30m가 넘는 런웨이 끝에서 보이는 톱포즈(Top Pose)는 보이지 않는 드라마에 찍힌 강조점이다.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쇼는 혼잡하고 긴박한 백 스테이지(Back Stage)와 차곡차곡 쌓인 준비 시간들이 완성해낸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긴박한 백 스테이지, 무대 뒤의 전쟁
“디자이너분, 빨리 와주세요”, “브라보~”, “20벌밖에 안 남았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런웨이가 고상하게 폼을 잡은 연못 위 오리의 모습이라면, 백 스테이지는 허둥지둥 발을 차는 물속 오리다. 모델에게 옷을 입혀주는 헬퍼(helper), 메이크업과 헤어를 담당하는 스탭, 모델에게 큐 사인을 보내는 조연출 등이 뒤엉켜 바쁘게 움직인다. 3월29일 오후 7시 쇼에 서는 모델 박근원은 이날 오전 12시에 나왔다. 그가 유독 부지런한 건 아니다. 대부분의 모델들은 “쇼가 시작하기 훨씬 전”에 나오며, 스탭들도 무대와 의상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뛴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쇼가 진행되는 20여분에 응축되는 셈이다. 쇼가 시작하기 20~30분 전. 동선을 확인하는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모델들은 의상을 갖춰 입고 대기한다. 객석에 관객이 들어오고, 음악이 흐르면 쇼가 시작된다. 조연출은 콘솔(음악, 조명 장비 등을 조정하는 오퍼레이터와 연출자가 있는 박스)과 인터컴으로 상황을 주고받으며 모델들의 순서를 확인한다. 모델 라인업과 해당 의상 등이 적힌 스타일링 맵을 손에 들고 각 모델이 해당 의상과 액세서리를 제대로 착용했는지 체크한다. 조연출이 모델들의 얼굴을 외우는 건 기본이다. 지춘희 쇼를 기획한 esteem의 하선아 과장은 “조연출을 하려면 2~3년은 경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모델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신인 모델들은 피팅과 리허설을 통해 얼굴을 익힌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 쇼(No Show, 준비된 의상이나 액세서리가 선보이지 못하는 것)는 피해야 하기 때문에 모델들의 착장은 헬퍼가, 디자이너가, 조연출이 거듭 확인한다. 심지어 조연출의 스타일링 맵에는 개별 모델의 옷걸이에 걸린 헬퍼맵(헬퍼들이 모델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체크하는 용지)과는 달리 모델이 “로드(런웨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가방은 멜 건지, 옆으로 들 건지, 주머니에 손은 넣을지, 뺄지”까지 적혀 있다. 쇼가 시작되면 옷을 벗고 입는 전쟁이다. 모델에 따라 입는 의상의 벌 수가 다르지만, 5분을 넘지 못하는 의상간 간격을 고려해 “간편한 의상은 30초, 복잡한 복장은 1분30초 내”에 갈아입는다. 셔츠도 단추를 놔둔 채 티셔츠처럼 위로 벗고, 지퍼를 채우면서 헤어 메이크업 점검을 받기도 한다. 모델 경력 6년차인 장수임은 “오래하다 보면 노하우가 생긴다”면서, “티는 팔을 먼저 끼고 목을 넣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이라고 일러준다. 신발은 사이즈가 크거나 런웨이가 미끄러울 경우를 대비해 밑창에 양면테이프를 붙이기도 한다.
패션을 통한 소통과 교류가 있는 곳
패션쇼는 옷의 축제임과 동시에 모델들의 파티다. 디자이너 지춘희는 이번 쇼의 기획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컨셉이 아닌 모델 선정을 의논했다고 한다. “장윤주를 꼭 세우는 것.” 지춘희의 뮤즈 격인 차예련, 론커스텀 정욱준의 이수혁처럼, 디자이너와 모델의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서울컬렉션도 행사를 시작하기 3주 전 모델 오디션을 치렀다. 컬렉션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쇼에 서기를 원하는 모델들이 오디션을 받는다. 디자이너의 선택을 받은 모델은 해당 숍에서 피팅과 워킹을 한 뒤 최종 확정을 받는다. 물론 도중에 탈락되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사람이 아닌 선택받는 사람이지만, 모델은 역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특정 디자이너의 쇼에서 발휘하기도 한다. 장수임은 “이번엔 시골 소녀의 느낌이었거든요. 워킹도 강하게 찍는 게 아니라, 걷는 듯한 느낌. 얼굴엔 살짝 미소를 머금고?”란 이유로 송자인을 자신의 이미지와 잘 맞는 디자이너로 꼽았고, 신민철은 “머리를 하얗게 탈색해서 머리가 휴지처럼 됐지만, 의상과 머리색이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아 기분좋았다”며 론커스텀 정욱준의 07 S/S 서울컬렉션을 기억에 남는 쇼로 꼽는다. 박근원은 “너무 남성적이기만 한 자신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주하기 위해” 좀더 많은 쇼에 서려고 한다.
4월4일 지춘희 쇼에는 총 80여벌의 옷이 선보였다. 20~30벌이 보통임을 고려할 때 다소 많은 옷. <물랑루즈> O.S.T 중 한곡인 <Your Song>을 배경에 깔고 진행된 쇼는 그래서 더 박진감있었다. 빠른 워킹과 힘찬 동력. “클라이맥스와 감동이 남는” 쇼의 여운은 20여명의 모델이 피날레를 마친 무대 위에 고스란히 남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기다림, 수벌의 옷을 벗고 던지고 입는 백 스테이지의 긴장감은 무대의 조명 뒤로 살며시 자취를 감췄다. 피팅감을 위해 “밥 대신 초콜릿을” 먹는 모델과, 쇼 당일 전날까지 의상과 라인업을 고치는 디자이너, “모델들의 에너지를 모두 빨아내기 위해 빨대가 된다”는 쇼 연출자. 패션쇼는 결국 극도의 혼란을 순간의 빛으로 폭발시키는 장르가 아닐까. “패션의 얼리 어댑터가 모이는” 장소임과 동시에, 패션을 통한 메시지의 교환이 이뤄지는 곳. 패션쇼를 뒤덮고 있는 모든 화려함과 알파벳 문자들을 거두고 나니, 남는 건 감정과 소통, 교류와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