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낙하산에 몸을 실었던 무모한 저널리스트.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스쳐 지난 세기의 로맨티스트. 사진가 그룹 매그넘(Magnum)을 창립하고 투철한 기자정신을 의미하는 용어 ‘카파이즘’(Capaism)을 탄생시킨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들이 한국에 온다. 3월29일부터 5월26일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포토저널리즘의 신화 로버트 카파展>에서는 떨리는 손으로 전장을 증언한 오마하 상륙 사진을 비롯해 모두 140점에 달하는 카파의 걸작들이 역사를 증언할 예정이다. 20세기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자그마한 카메라를 쥐고 숨어들었던 헝가리 출신의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극적인 삶을 반추한다.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고, 로버트 카파에 대한 전기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연배우로는 앤디 가르시아를 기용하고 싶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선악을 판별하기 어려운 눈빛, 일자에 가까운 윗입술과 달리 도톰한 아랫입술에 머금은 미소는 보는 시선에 따라 짓궂은 장난기를 숨기거나, 뭔가 교활한 의도를 가장한 듯 보인다. 이것은 로버트 카파의 외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1913년 10월22일 앙드레 프리드먼(Andre Friedman, 카파의 본명)은 노름과 거짓말을 즐겁게 오가는 재능을 지닌,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 데죄 프리드만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처 펴지지 않은 그의 한손은 육손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길 바랐지만, 소망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녀의 아들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어느 여인과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죽었다.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늘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동유럽에 몰아닥친 빈곤과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탄압은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인 카파에게 마르크시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좌파 이념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유혈테러가 빈발하던 헝가리에서 그는 종종 좌익혁명가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17살의 나이로 망명도생(亡命圖生)의 길을 떠나야 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프리드먼은 신생 바이마르공화국의 수도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브레히트의 연극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었고, 조국에서 쫓겨난 가난한 젊은이였다. 그는 하숙집 주인의 개먹이를 훔쳐 먹어야 할 만큼 가난했으므로 어떻게든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는 카메라를 택했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의 첫 번째 촬영대상은 스탈린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며 쫓기고 있던 트로츠키였다. 망명자가 촬영한 망명자의 모습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듯했고, 카파, 아니 아직 프리드먼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진을 <슈피겔>에 게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도 그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거리엔 어느새 갈색셔츠를 입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활보했고, 1933년 2월 독일제국의회가 불타자 반란자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린치가 가해졌다.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파리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평생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타로 역시 파시즘을 피해 파리에 온 망명자였다. 그녀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엔 이미 공산당 조직의 열성 당원이었다. 파리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던 그는 타로에게 2주 만에 카메라 조작법을 가르쳤고, 타로는 아직 거칠기만 했던 젊은 프리드먼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프리드먼에게 타로는 피터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 같은 존재였다. 타로 덕분에 프리두먼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무명의 이방인 사진가였던 그를 프랑스를 방문 중인 돈 많고 유명한 미국 출신 사진가 로버트 카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일반 가격의 세배를 받고 사진을 팔아치웠다.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타로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오늘날 로버트 카파란 이름은 포토저널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뜨거운 피, 언제나 현장에 가장 근접하고 싶어했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 민중과 역사가 가장 극렬하게 부딪치는 현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1936년 스페인에서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사진을 계기로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우연도 작용했다. 돌격 중에 총에 맞는 병사를 촬영하여 오랫동안 조작 여부로 뜨거웠던 이 작품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때마침 창간된 <라이프>에 게재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로버트 카파는 41년의 짧은 생애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전장을 누비며 그가 밝혀내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언제나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전쟁 사진이라 통칭하여 부르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발명 이래 전쟁은 언제나 매스미디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왔다. 대중은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이 죽을 염려만 없다면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의 이야기에 매료되어왔다. 지배계급은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대중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국가의 전쟁의지에 동원하기 위해 전쟁을 즐겨 영웅담으로 변조해냈다. 호기심과 동원이라는 양자의 이익이 절묘하게 결합된 전쟁 사진은 언제나 많은 수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촬영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초기 사진술의 발전 이후에도 전사한 병사, 참혹한 부상병 사진은 게재될 수 없었다.
전투 현장과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는 순간에도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들은 승리를 찬양하고, 후방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민간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이 같은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로버트 카파였다. 그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 게재된 뒤 많은 이들이 전쟁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품에서 불려나와 이름 모를 언덕과 골짜기에서 숨져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인이었던 타로마저 작전 중 급하게 후진해온 아군 전차에 깔려 숨지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이후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은 영원히 전쟁터를 떠돌게 될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탄생한 최고의 걸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었다.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선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도리어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었고, 카메라조차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를 구한 것도 전쟁이었다. 그는 <콜리어즈>에 채용되면서 전선으로 복귀하는 극적인 행운을 만난다. 카파는 영국을 거쳐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취재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유부녀 핑키와 밀애를 즐겼다.
종군기자는 병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지만 취재를 마치면 후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었고, 원치 않으면 취재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2만에서 3만명이 전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오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로버트 카파는 다시 한번 전선으로 향하는 패에 모든 것을 걸었다. 평소 도박을 즐겨하던 그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되었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에서 카파는 죽음의 공포로 떨리는 손을 거머쥐고 35mm 필름을 이용해 전투장면을 촬영했다. 35mm 필름 네통에 담긴 전투장면이었지만 흥분한 조수가 실수하는 바람에 인화할 수 있었던 사진은 고작 11프레임에 불과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기관총 사격과 포격 속에서 촬영된 사진은 흔들렸고, 핀트도 맞지 않았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에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 미국 할리우드, 1946년
이때 그의 사진을 인화하며 실수로 필름을 녹여버렸던 조수는, 훗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로버트 카파상을 1963년과 65년에 연거푸 수상한 베트남전 종군사진기자 래리 버로즈다. 그 역시 베트남전 취재 중 헬기 추락으로 로버트 카파의 뒤를 따랐다. 로버트 카파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진 중 하나는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4월18일 라이프치히에서 촬영된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무렵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 중 하나였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막 평화가 찾아온 유럽에 당시 <카사블랑카>와 <가스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날아왔다. 이 무렵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카파는 런던으로부터 핑키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만나는 즉시 강하게 끌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배우는 여전히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지만, 종군기자였던 카파에겐 촬영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파는 할리우드까지 날아가 그녀를 촬영했지만 결코 결혼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잡지사와 사진기자들 사이에 있었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행동주의 ‘카파이즘’
카파는 전쟁 사진을 단순히 관찰하는 입장 대신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은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전쟁의 실상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곤 했다. 로버트 카파는 객관적인 관찰자이기보다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참여자로 행동했고, 그 같은 신념에 따라 사진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작품의 영혼까지 소유해야 했다. 카파는 오랜 동료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1947년 사진작가들의 협동조합인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주도권을 잡지사에서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과 주체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로버트 카파는 작가 스타인 벡과 함께 전후의 소련을 방문해 취재했지만 촬영한 사진들 중 상당수는 검열 때문에 되찾을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취재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옹졸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겠다”며 매그넘의 다른 사진가들과 함께 취재를 포기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근접해 들어가, 검열과 맞서 싸우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카파의 행동주의는 훗날 카파이즘(Capaism)이라 불리게 되지만 정작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취재를 거절했다. 그 까닭에 대해 카파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신은 전쟁을 혐오하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면 권총으로 자살해버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베트남전쟁이라 불리게 될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 최후의 사진, 인도차이나 전쟁, 1945년 5월25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극성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의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카파는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계속해서 감시당했다. 엘리아 카잔 감독 같은 이들조차 반미주의자로 지목되자 주변의 동료를 밀고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로버트 카파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혐오해 마지않던 마지막 전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25일.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병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그 모든 것을 잊는다”고 말했던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60여명의 종군기자가 베트남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