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원짜리 쿠폰과 경품 이벤트에 눈이 멀어 <처음처럼>을 샀다. 신영복이 쓰고 그린 <처음처럼>은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지만, 조그만 검은색 노트가 함께 들어 있어서 용서가 되었다. 책보다도 노트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매끄러운 미색 종이가 예뻐서 만지작거리다가 예전에 좋아했던 글을 발견했다. <함께 맞는 비>라는 제목만 보고도, 나는 그 글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慰勞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읽고 기억했던 글이 변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함께 맞는 비>와 함께 한꺼번에 풀려나왔다.
대학 3학년이었던 1997년이었다. 나는 인문대 학생회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와 단대 선거운동 본부가 모두 모여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 글을 받았다. “진정한 연대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우산 속에는 두명밖에 들어갈 자리가 없지만 비는 온 세상에 내리는 것이어서, 나는 그 문장을 좋아했다. 그때 우리의 모토는 ‘연대’였다. 나는 ‘Solidarite’라고 적힌 점퍼를 입고 친구 자취방에서 차게 식힌 블랙커피를 원샷하며 그 문장을 인용하여 학생회장 후보의 출사표를 썼다. 친구 방에 있던 조그만 냉장고와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유리병, 밤에 사다 먹던 닭꼬치, 처음 해본 프리셀 게임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발췌된 문장이 아닌 전체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시큰둥했을 것이고 그 문장을 잊었을 것이다. 그때는 위로가 덧없고 감상적인 것이라고 믿었을 테니까.
그리고 십년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문대 앞 공터에서 외쳤던 ‘Solidarite’가 얼마나 덧없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선배들은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고시에 합격했고 아주 가끔 만날 때마다 주식과 부동산을 포함한 재테크에 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곤 한다. 그들은 문득 내게도 묻는다. 엔터테인먼트 관련 주식은 무엇을 사면 좋을지. 그러면 나는 피식 웃으며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니, 따위로 대답을 하고, 그렇더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근데 그 회사 영화는 올해 줄줄이 망했어, 따위를 덧붙인다. 나이를 먹으면 모두 그렇다고들 하지만 나이 탓은 아닌 듯하다. 위로를 연대로 바꾸어 선거운동을 하며 우리는 모두 연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나는 몰랐던 것 같고 지금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위로가 무엇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고 있다.
이를테면 온기 같은 것, 혼자 있으면 전기장판을 틀어야 하는 추운 날, 그 스위치를 끌 수 있도록 방 안의 온도를 높여주는 체온 같은 것. 그것이 위로다. 그러니까,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내 방엔 날마다 비가 온다. 이따금 햇빛이 비추는 듯했던 삶은 끝나지 않는 장마철로 접어들었는데, 내겐 그 비를 막을 우산 한개가 없다. 연대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