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재전> 3월7∼20일 인사아트센터 1층 02-736-1020
쌀알의 유쾌한 외도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다. 차분히 밥상에나 올라야 할 쌀알들이 형형색색 캔버스 화면과 만나, 20세기 대표적인 인물들의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미술가 이동재(33)는 ‘쌀알작가’로 통한다. 2002년 ‘농업과 예술’을 접목한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쌀을 작품의 제작 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쌀알은 단지 식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오랜 시간 축적된 인류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가 함축된 캡슐인지도 모른다. 이동재가 주목한 20세기 아이콘은 인물이다.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마더 테레사, 루이 암스트롱, 마오쩌둥, 존 레넌, 백남준, 헤밍웨이, 피카소….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인물상은 그대로가 인류 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이며, 각각의 주인공들은 각계의 활동 배경을 대신한다. 예술가로서의 앤디 워홀이나 피카소, 정치가 마오쩌둥, 종교인 마더 테레사, 음악인 존 레넌, 문학가 헤밍웨이 등. 그래서 이동재의 작품은 인류 현대사의 파노라마라는 표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동재의 인물이 매력적인 요소는 또 있다.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가로세로 5㎜의 사각형을 하나의 단위로 해 쌀알을 붙여 하나의 인물형상을 완성하는데, 대략 80호(145×112cm) 정도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꼬박 열흘간 쌀알을 3만개 이상 붙여야 한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화는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점묘기법이나, 기본 망점으로 구성된 TV 브라운관 혹은 인쇄 매체를 연상시키고 있다. 작가는 쌀알의 유기적인 생명성을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집중력으로 풀어내는 재주가 비상하다. 한 작품을 통해 지나간 아날로그적 사고와 미래지향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동시에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적 센스는 바로 인물 성격의 해석과 표현이다. 화면의 기본 망점인 도트(dot)는 쌀알 이외에도 콩, 팥, 알약, 단추 등 여러 가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각각의 도트 재료는 인물을 이해하는 코드가 된다는 점이다. 가령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전해지는 마릴린 먼로를 알약으로 표현했는가 하면,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동음이의어인 쌀로, 가수 현미는 ‘현미’로, 영화 <미스터 빈>의 주인공 로완 앳킨슨은 ‘콩’으로, 녹두장군 전봉준은 녹두로 표현하는 센스도 발휘한다. 작품의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면서 미학적 중의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이동재전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의 ‘더 컨템포러리전’(The Contemporary) 기획 시리즈의 첫 번째이다. 이는 젊고 역량있는 유망작가 6명(홍지연, 도성욱, 김지혜, 안성하, 지용호)을 선정해 올 한해 동안 소개한다는 대형 프로젝트다. 그중 이동재 작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 시리즈 10점과 마오쩌둥 시리즈 18점 등 4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