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독서, 뒹굴거리기 등으로 채워지는 단조로운 생활에서 그나마 이벤트라고 할 만한 게 헌책방 순례다. 갖고 싶었던 책을 싼 가격에 장만하는 것도 좋지만, 나온 지도 몰랐던 신기한 책, 사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새 책들을 손에 넣는 게 더 근사하다. 며칠 전 일본에서 91년 나온 <메가드라이브 팬>이란 잡지를 발견했다. ‘메가드라이브’는 최근 퇴출된 세가의 게임기 ‘드림캐스트’의 할아버지격인 게임기다. 맨 앞을 장식하는 게임은 <샤이닝 더 다크니스>다. 이 게임은 당시 일본에선 흔치 않던 3D 던전 스타일의 롤플레잉 게임이었기 때문에 전투시스템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시리즈는 <샤이닝 더 홀리아크>라는 후속편,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역시 ‘샤이닝’이라는 머리말이 붙는 시리즈물인 <샤이닝 포스> 등으로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난 게임이 더 많다. 30대 이상이라면 오락실에서 하던 <원더 보이>를 기억할지 모른다. 용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칼에서 방울이며 고리가 나가던 게임으로, 초반 보스인 이상한 생선가시 같은 녀석이 인상적이었다. 시리즈가 3편이나 이어졌지만 메가드라이브를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 게임기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게임들도 실려 있다. 액션 게임을 새롭게 진화시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세가의 <게인 그라운드>가 장장 7페이지에 걸쳐서 공략되고 있다. 원래는 아케이드 센터용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메가드라이브용으로 새롭게 컨버전된 게임이다. 이 게임은 미쳐버린 가상 전쟁 시뮬레이션 기계를 제압하기 위해 파견된 요원들의 이야기다. 맵에 따라 다양한 특기를 가진 대원들을 선발하고 이를 살려 작전을 세우는 게임으로,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전략성이 부여된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시스템이었는지 사람들의 외면 속에 사라졌다. 이 게임이나 <헤어조크 쯔바이> 같은 게임들이 있었기에 실시간 전략 게임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많은 ‘스타크 플레이어’들 중 <게인 그라운드>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몇 페이지씩 광고를 밀어붙이며 거창하게 선전하던 것들 중 게임사에 별다른 의미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게임들을 보면, 그 뻔뻔함에 화가 나기보단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눈 딱 감고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진정으로 믿었을 것이다.
게임의 수명은 길지 않다. 잘 만든 게임이라도 3, 4년을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이름은 남는다. 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어떤 게임은 게임기를 몇 세대씩 이어가며 시리즈가 계속된다. 어떤 게임은 존재 자체가 기억 속에서 말소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독창적인 기획과 뛰어난 게임을 가진 시스템이 철저하게 외면되고, 뻔한 패턴의 짜맞추기 게임이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속편한 개똥 철학으로 얼버무리려해도 어딘지 뱃속이 개운치가 않다.
잡지를 뒤적이며 “붉은 스페이스 재킷의 고고한 파일롯”인 “아케이드 업계의 초실력파” ‘금자제작소’가 만든 <헤비 유닛>이 그다지 고고한 삶을 보여주진 못하고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하고, 한껏 높아진 눈으로 보면 초라한 <구극 타이거>가 “최종 구극 메가드라이브판”이라는 기치하에 선전되고 있는 걸 보며 ‘최종’, ‘구극’이란 말의 아이러니컬한 울림을 혀끝으로 느껴보는 걸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