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처음 안 건 대학 시절 교련 수업 때였다. 학과가 달라 평소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지만, 교련 수업은 단과대학별로 수강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그를 봤다. 자주 얼굴을 부딪치다 보니 졸업할 때쯤에는 인사말 건네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 졸업을 하고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을 하고 출입처에 나갔는데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를 또 만났다. 그렇게 5년 정도를 같은 출입처를 나갔다. 입사 10년이 지나 내가 사표를 내고 모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만나자고 해서 다시 만났다. 당시 그는 경찰출입기자들의 우두머리인 시경캡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대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그는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한 학기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기자직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건 딱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현재의 자리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글쓰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를 위해 그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십수년간 열심히 쌓아온 기자 경력을 버렸고, 물려받은 유산없이 월급으로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썼으며, 공부하는 내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웠다. 덕분에 5년 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얼마 뒤 한 명문대학에 교수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은 재임용을 위해 논문 집필과 강의준비에 매진했다. 지난해 가을 그는 재임용을 통과했다. 그 무렵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했다. 좀더 안정적인 자리를 위해 불안과 싸우며 7, 8년을 보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 나와 공동연구를 하던 그는 잦은 두통과 언어장애를 호소했다. 병원진단 결과는 뇌종양 말기였다. 치료를 위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동안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 보험도 들어놓은 게 없었다. 늦게 낳은 아들은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꿈꿨던 안정을 누리는가 싶은 순간에 그는 생애 가장 불안한 상황 속으로 미끄러졌다.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불과 두어달 사이에 그가 겪은 지옥 같은 마음의 풍경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다. 종종 그는 억울했해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했다. 더러는 안정을 위해 매진한 자신의 삶을 회한어린 눈길로 쳐다보기도 했다. 병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투병의지를 불태우는가 하면 이내 더불어 가야 할 친구로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있던 시선을 거두어 자기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가 한창 진행될 때쯤이었다. 그는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공기 좋은 조용한 시골에 들어가 마음을 다스리며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노후를 위해 저축과 연금을 들고, 투병을 위해 암보험을 들고, 더 안정적 직장을 위해 대학원에 등록하고, 자녀의 안락한 삶을 위해 교육에 조기 투자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위해 자신의 노동생산성을 쥐어짜야 하고,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주와 흡연을 하고, 피로를 씻기 위해 헬스클럽에 등록해야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주변의 인간관계가 도구적으로 되고, 소통없는 내면은 황폐해지고, 정서적 충족을 위해 불륜까지 몽상하고… 그리하여 다시 회귀하는 불안을 잊기 위해 지속적으로 안정의 고지를 향해 전진하는 이 단성생식의 삶. 2007년 한국사회의 중년, 누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불안을 잊기 위해 안정의 고지를 구축하는 데 매진하는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안정의 고지는 다가가면 멀어지는 신기루이며, 부재의 대상은 욕망할수록 불안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을 극복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아직은 잘 모른다. 아마도 나눔이 아닐까 하는 심증은 간다. 불안이 내가 가진 것 혹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상실의 공포에서 비롯된다니, 본인이 먼저 나눠주면 상실의 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릴 테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형식논리를 우리는 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