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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마음에 꽃이 피다, <타인의 삶> 첫 공개
오정연 2007-03-08

일시 3월7일 장소 명보극장

이 영화 베를린 장벽 붕괴를 5년 앞둔 1984년의 동독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안전부의 온갖 악랄한 행태가 지배하는 암흑사회다.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는 비밀경찰 비즐러(울리쉬 뮤흐)는 촉망받는 젊은 극작가 드레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여배우 질랜드(마티나 게덱) 부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도청과 미행 등 일련의 입체적인 방법을 동원해 감시하던 비즐러는 사회의 불의를 향해 뜨겁게 분노하고,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간절히 바라며, 서로를 향한 절절한 사랑 역시 남김없이 표현하는 감시대상의 삶에 점점 깊숙히 빠져든다. 때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때로 그들의 삶을 보호하면서 비즐러의 삶 역시 변화를 겪게 된다.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이자 독일영화상에서 최우수독일영화상을 수상한 기대작이다.

100자평 타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이를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까지 손에 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의 우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그 감시의 대상이 주체를 변화시킬만큼 매력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독일인에게는 이제 홀로코스트 만큼이나 익숙한 소재라고 할만한 통일 이전 동독의 암울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타인의 삶>은 진부한 사회드라마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가는 영화다. 검열이 팽배한 당시의 사회는 그저 재료에 불과할 뿐, 인간이 또다른 인간에 의해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듯한 비즐러를 연기한 울리쉬 뮤흐의 얼굴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금씩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이며 예전의 그라면 하지않을 선택까지 감행하는 모습은 비즐러가 원래 지니고 있었던 검소한 청교도인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지극히 독일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씨네21> 오정연 기자

<타인의 삶>은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이 이루어지던 구동독시절에, 한 지독한 비밀경찰이 자신의 사찰대상자를 감시하다가, 그의 삶에 빠져들어 목숨을 걸고 그를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설득만 된다면' 대단히 감동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 큰맘먹고 와~ 감동이야~ 박수치며 넘어갈 수도 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감정선을 쥐고 흔드는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은 그러한 '충동적 감동'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다시금 정신을 수습하고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 그의 심경의 변화를 감지할만한 대목은 너무 미미하다. 그가 사찰하는 대상을 알아갈 수록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거나, 상대가 예술가이다 보니 '예술적인 매혹'을 느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정치적 입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보기엔 무리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치적 입장은 (아무리 망상처럼 보이는 신념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체계화된 것이어서, 인간적이거나 예술적인 임팩트가 오더라도 그것이 그의 체계안에서 재구도화되는 것이지, 그리 허술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그가 이전에는 '타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없어서 완고한 비밀경찰이 되었겠는가? '타인의 삶'을 보아도 늘 '내식으로' 보기 때문에 공고한 신념체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 신념체계를 비집고 가치관을 송두리채 뒤흔들어놓는 사건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우리는 그것을 '(개종을 부르는) 기적'이라 부른다. 영화 속에는 그러한 '기적'이 그려져 있지 않다. 보지 않고도 믿는자는 복되다고 하지만, 과연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외람되지만) '스토커 짓을 하다가 사랑에 빠진 일종의 퀴어영화'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황진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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