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감독이 영화 <훌라걸스>의 한국 개봉에 맞춰 방한했다. 오전 9시라는 이른 인터뷰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 산책을 마치고 인터뷰에 응했다. 눈물, 감동, 웃음이라는, 전작과는 다른 요소가 가득한 신작 <훌라걸스>와 지난 한해 일본에서 20여개가 넘는 영화상을 거머쥔 이상일 감독. 그 화려했던 성공 뒤편에 숨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번 영화는 씨네콰논 이봉우 사장의 기획에서 시작됐다고 들었다. 연출제의를 받은 게 언제인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건 2년 전이다. 당시에도 이미 1년 전부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지 리서치나 취재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고, 그때의 시나리오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다. 하와이안센터의 사장이나, 광부에서 밴드 멤버가 된 남자가 주된 역할인, 남성 중심의 이야기였다.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하면서 춤추는 여자들을 메인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제의했고, 다행히 이봉우 사장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더라.
--기획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일단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원이 바뀌고 있다는 시대의 변화에 마음이 끌렸다. 또 그 시대배경 속에서 하나의 커뮤니티가 변화해간다는 것, 거기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대처해간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남자들이 낡은 생활방식에 얽매여 주저하는 동안 여자들이 먼저 변화에 대처해나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시나리오의 설정을 거의 다 바꾸었다고 들었다. =받은 대본을 갖고 다시 해보자는 생각으로 고치기 시작하자 결국 처음부터 다 내가 만들어가는 것처럼 되었다. (웃음)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세대고,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에 난점도 많았지만, 사람의 감정, 관계, 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다듬었다. 40여년 전 작은 마을이란 공동체 안에서 사람간에 느끼는 거리감은 지금과 다를 것 같았다. 또 당시의 젊은 사람들도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선택이 제한된 상황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관계성을 중시하며 이야기를 다시 썼다.
-영화 속에 나오는 마을과 하와이안센터는 어디서 촬영했나. =하와이안센터는 이와키시에 실제 있는 하와이안센터에서 촬영했다. 마을은 정확히 이와키시가 아니다. 혼슈 지방이 일본의 3대 탄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매우 넓다. 영화에 나온 곳이 그중 일각이긴 하지만, 정확히 이와키시는 아니다.
-현재 탄광이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어서 그랬던 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전화기를 가리키며) 3대 탄광이 이 테이블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딱 전화 사이즈 정도의 주택가밖에 남아 있지 않다.
-<훌라걸스>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군상극이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야기를 특정 인물과 사건으로 좁혀서 진행할 생각은 없었나. =군상극으로 하고 싶었다. 하나의 커뮤니티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빨리 대처하는 사람도 있고,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망설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생각과 입장의 차이를 드러나게 하고 싶었다.
<훌라걸스> 촬영현장에서 이상일 감독과 주연배우 아오이 유우(왼쪽부터)
-시즈짱이 연기한 사유리의 경우, 남성적인 외모를 한 소녀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매우 여성적인 꿈을 이뤄간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주변 인물은 어떤 식으로 설정했나.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처음 춤을 시작하는 인물이 네명인데, 이들이 다 같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 서로 다른 생각, 외모,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이 나중엔 하나로 모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캐릭터의 갭(gap)이랄까. 도저히 춤을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소녀가 춤을 추고, 매우 무뚝뚝해 보이는 아버지가 딸에게 애정을 갖고 있고, 선한 이미지의 아버지는 딸을 때린다. 실제로 사나에의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는 일본에서 무척 상냥하고 착한 이미지다. 반면 사유리의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는 필모그래피 중 98%가 야쿠자 역이다. 한 인물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갭을 표현하면 재밌을 것 같았다.
-<훌라걸스>는 <69 식스티 나인>에 이어 60년대가 배경이다. 세대간의 충돌, 시대의 충돌에 대한 감독의 흥미가 60년대를 자주 소환해내는 것 같다. =60년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 같다. 어느 시대건 세대간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게 충돌이란 모습으로 표현되고, 이를 좀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시대가 60년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한다. <69 식스티 나인>과 <훌라걸스>는 배경이 된 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두 영화의 시대배경이라면 시대와 세대, 가치간의 차이가 좀더 다채롭게 충돌했을 거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은 뭔가 불투명해진 느낌이랄까. 요즘은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조차 불명확해진 것 같다.
-<69 식스티 나인>의 축제, <훌라걸스>의 훌라댄스 등 그 가치관의 충돌을 유희로 풀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르지 않나. 그래서 충돌하는 것 같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충돌을 하게 마련이다. 영화 일을 하다 보니 실제로 그렇더라. (웃음) 하지만 나는 그 충돌에 대처하는 방식도 개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즐겁게 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즐겁게 살면 좋겠다는, 다소 이기적인 생각을 한다. 물론 모두가 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미국처럼 되어버릴 것 같지만. (웃음) <훌라댄스>는 댄스라는 것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화해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람문제라는 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댄스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영화로 풀어가면 이야기가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이전 인터뷰들을 보니 ‘재일’에 대한 정체성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인물들도 데뷔작인 <청>에서는 ‘재일’에 대한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일본 보편사회 속에서 소외된 인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재일에 대한 정체성이 엷어지는 건 아마 세대가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당연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내 생각의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뿌리는 ‘재일’이고, 이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본의 메인 스트림 밖에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다. 최근 일본에는 힐즈(hills)족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롯폰기 힐스에 있는, IT성공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을 영화에 담아본다고 한들 뭐가 재미있을까. 아마 이런 사람들은 숨기고, 꾸미는 게 더 많을 것 같다. 화내고 싶을 때 화내고, 울고 싶을 때 울고, 포기하거나, 이기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그리는 게 더 작위적이지 않을 것 같다.
-전작들에 비해 영화가 많이 대중적으로 바뀐 것 같다. =일본에서는 내 전작과 이번 영화가 똑같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인데. (웃음) 나는 이번 영화가 전작들에 비해 크게 어긋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전작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이번에는 영화감독으로서 관객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전 작품들은 그때 그때 내가 부딪힌 문제들을 바로 영화로 만든 거다. 하지만 이번 작품도 큰 변화라기보다는 이전 작품에 대한 반작용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살아 있는 거다. 2, 3년 뒤의 스케줄을 지금 정해서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그때 그때 느끼는 것들이 하나의 작품이 되어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예전에도 감각에 순순히 따르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난 한해 일본의 영화상을 비롯해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영화 외적인 면에서 이번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본에는 ‘결과가 좋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훌라걸스>는 결코 순탄하게 진행된 영화가 아니다. 기획 단계에서 2년을 소요했고, 내가 참여한 뒤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요즘 일본영화가 잘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형 TV영화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훌라걸스>는 순수하게 영화적인 작품인 것 같다. 잘 팔리는 원작을 가져와서, 잘나가는 배우들을 데려다가 만든 영화는 아니니까. 영화 외적인 것들이 일절 들어 있지 않은, 영화인을 위한 영화다운 영화인 것 같다. TV를 통한 대량 선전도 없었고, 쟈니스 계열의 인기배우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도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다른 기획영화의 제안도 많이 들어올 것 같다. 연출을 하겠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뭔가. =굉장히 심플하게 말하면, 그 영화를 내가 보고 싶냐, 아니냐다. 제의를 받은 영화도, 내 발상에서 시작한 영화도 모두 내가 보고 싶다고 느낄 때만 연출을 결심한다. 이런 건 되고, 이런 건 안 된다는 고정된 판단 기준은 없다.
-모 인터뷰에서 다음엔 시대극, 대작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 =시대극에 대작이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웃음) 아직 구체적인 기획은 없다. <훌라걸스>가 잘돼서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일로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에(웃음), 좀더 빨리 차기작에 착수해야 했는데, 지금 막 구상 단계이다. 아직 어떤 형태의 영화가 될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