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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정희진(대학 강사) 2007-03-09

투표일까지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1, 2위를 다투는 상황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양한 선택권 차원에서 볼 때, 불행을 넘어 ‘비참’한 생각까지 든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과 출신 배경이 모두 유신체제이고, 이들은 결국 누가 더 본질적으로 ‘박정희 원본’에 가까운지를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인이다. 그런데 지난 1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논란 중에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이명박씨가 박근혜씨를 두고, “나처럼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수 있고, 고3을 4명 키워봐야 교육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박근혜 후보는 “그런 논리대로라면 군대 안 간 남자는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며, 병역을 이행하지 않은 이 후보를 공격했다.

두 사람의 발언은 일종의 성별화(性別化)된 국민 성원권, 즉 시민권 논쟁이다. 아무나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당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는 애를 낳아야 하고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데올로기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정상적인 국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누가 진정한 국민이냐를 둘러싼 범주의 문제는, 늘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은 인권 침해 발상이다. 현재 남성 징집 대상자의 약 절반만이 현역으로 복무한다. 배경있는 집안의 ‘신의 아들’들, 고졸 이하, 수형자, 고아, ‘혼혈인’, 트랜스젠더는 병역에서 면제(배제)되거나 면제를 신청할 수 있다. 심지어 병역이 면제되는 신체적 ‘결함’ 중에는 무정자증도 있다(이들은 겉보기엔 ‘멀쩡’하기 때문에 대개 병역을 이행한다). 또한 현재 한국은 25∼40살의 가임 여성 중 20%가 비혼(非婚) 상태이며 결혼해도 출산율 1.08명인 세계 최하위 출산국이다. 두 후보의 주장대로라면, 병역을 기피하든 면제받든, 불임이든 출산 거부든 간에 이 여성과 남성들은 모두 ‘국민’이 아니다.

두 번째 이상한 점. 이명박씨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다. 남자가 애를 낳다니. 게다가 그는 평생을 ‘근대화의 역군’, ‘회사 인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마도 자녀는 주로 그의 부인이나 가사 도우미가 양육했을 것이다. 고로 그는 아이를 낳은 적도 키운 적도 없다. 그럼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그토록 당당하게 박근혜 후보가 아이 낳은 경험이 없다고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하긴 (남성들이 기록한) 성경에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남자가 애를 낳는다고 쓰여 있긴 하다. 가부장제란 한마디로 여성의 몸과 노동에 대한 남성의 해석체계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노동은 주로 여성이 하지만, 아이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는 남성이다. 여성은 사적인 존재 혹은 ‘2등 시민’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인정하는 것은 합법적 의미가 없다. 아이는 아버지의 인정으로 공적 영역에서 승인될 때, 비로소 주민등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회는 남성이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그냥 ‘개인적으로’ 생겨난 애라며 ‘사생아’(私生兒)라 부른다(“어머니 날 기르시고, 아버지 날 낳으시고…”라는 노래 가사를 보라).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자와 그 아들들의 병역 이행 문제는 당락을 좌우하는 쟁점이었다. 이번에는 여성 후보가 있다 보니 출산 논쟁이 추가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실제로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신들부터 ‘국민 자격 미달’이면서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병역 기피 혐의가 짙은 이명박씨와 미혼으로 출산하지 않은 박근혜씨의 ‘결함’을 동급으로 볼 수는 없다. 법적으로 병역은 의무지만, 출산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식있는 정치 지도자라면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주류에 가까운 국민인지를 증명하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국민을 어루만지고 이들도 국민으로 포함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진짜 애 낳아봤냐”, “현역으로 군대 갔다 왔냐”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다툼이 아니라 국민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생산성있는 논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