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목소리> 시사회였다. 우연히 마주친 한 영화인은 “이동국, 영국으로 가서 서운하겠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그에게 “기회가 된다면 이동국 다큐를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미들즈브러에 입단했고 ‘목욕탕에서 처음 만나 사인을 받고 축구를 결심하게 한 가장 존경하는 선배 황선홍’이 달던 18번을 배정받은 이동국의 사진을 보며 까닭없이 눈물이 났다. “항상 좋은 길만 걷다가 월드컵에 두 차례 못 뛰어 마음고생을 말할 수 없이 겪었다. 그러나 뛰지 못하는 시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축구하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에는 웃자는 생각으로 항상 준비했다”는 이동국의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이 번졌다. 그는 그렇게 늘 운동장에 서 있었다.
공덕리 씨네리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난 그저 구경꾼이었다. 관중석에서 충무로라는 피치를 바라보며 욕을 하고, 화를 내고, 즐거워하고, 슬퍼했을 따름이다. 한국영화 리그에서 꽤 알려진 중계방송 씨네21은 내가 영화의 피치로 다가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용구장의 철망에 얼굴을 들이대고 선수들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대듯,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곁에서 이야기를 건네고 숨소리를 느끼며 ‘지면’을 통해 관중석에 더 재미있고 사람냄새가 나는 경기 상황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좋은 기자였던 것 같진 않다. 냉철히 상황을 바라보는 데 난 익숙하질 못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텍스트를 평하기보다는 숨이 턱에 닿도록 영화를 만드는 그들 몸짓에 언제나 눈길이 먼저 갔다. 영화적으로 미흡한 완성도를 살피기보다는 현장에서 조바심을 내며 작업을 재촉하던 그들의 눈동자가 나를 괴롭혔다. 그러면서 객관적이고 정확한 중계를 위한 기본적인 태도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누구를 위해 중계를 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워졌다. 나, 씨네21, 독자, 아니면 경기를 뛰고 있는 영화인들을 위해서? 그건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고 후일에도 쉬이 깨닫지 못할 듯하다. 그래서 중계차에서 내려 피치로 걸어가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복사기 위에 배달되던 내일치 한겨레신문, 회의실에서 야밤에 시켜먹던 양배추쌈, 이레분식의 콩나물국, Y선배가 노래방에서 부르던 <황홀한 고백>, 식신 J의 앙증맞은 고양이 인형들, 담배연기로 자욱했던 사장실, 가끔 몸을 누였던 옥상 스튜디오의 삐걱거리던 자물쇠, 디자인팀 고이즈미와의 동반 흡연, 유쾌하게 술을 마시던 경영지원팀 시스터스, 냄새나는 라꾸라꾸 침대, S선배의 꼼꼼하고 다정했던 기사에 대한 트레이닝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고마웠고 꽤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UCC로 봤던 ‘보아가 흘린 눈물의 이유’라는 다큐에서 공연을 끝낸 보아는 “춤추지 않고 노래만으로 라이브를 하는 게 10대의 마지막 숙제라 생각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정상에 선 보아나 프리미어 데뷔전에 나서는 이동국보다는 한참 늦었지만 나도 마지막 숙제를 하고 싶어졌다. 입사 때부터 아주 좋아했던 초미녀 Y선배는 “당신들은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며 근사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마도 그건 그가 수리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나의 오랜 동네 술친구 N양, 아니 라디오 방송국으로 간 공룡양은 ‘손잡을 타이밍’을 아쉬워하며 자리를 비웠다. 그는 전파에 못다한 이야기들을 실어 바람 결에 전할 테지. 나에게 이곳은 어떤 영화로 기억될까. <달콤한 인생>쯤일까.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