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에로영화를 자주 본다. ‘임에도 불구하고’란 말이 스스로도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난 성별과 에로 취향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 에로티시스트다. 또 에로영화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어서 ‘노모’나 ‘엑기스’ 등을 키워드로 영화의 명장면(?)이 아니면 자위가 잘 되지 않는다. 에로영화를 보는 이유는 하나다. 외로워서. 하지만 외로울 때마다 보는 에로영화가 다른 정서를 자극할 때가 많다. 불쾌함이다. 에로영화를 만드는 대다수가 남성이기에 마초적인 시선으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불쾌한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게 남성 취향의 페티시즘이 ‘눈알’에 와서 박힌다는 데 있다.
<어린이 바이엘 상권>이란 단편영화가 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시절, 사춘기 초등학생의 성욕을 다룬 것이다.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한국 소년의 심정을 이해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봤다. 문제는 그 뒤부터다. 나는 반나절 동안 영화 속 소년의 시점으로 사물을 보았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브래지어 끈, 여중생의 봉긋한 가슴, 20대 여성의 미끈한 다리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같은 여자이자 이성애자로서 여자의 특정 부위를 보고 흥분하다니 스스로가 변태롭게 느껴졌다. 물론 변태적인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클레르의 무릎>이란 영화를 보면, 소녀의 무릎을 만져보고 싶어 안달난 남성이 나온다. 변태라고 보면 변태겠지만, 변태적 감성 역시도 인간의 순수한 욕망 중 하나다. 변태의 두 요소는 관음증, 페티시즘이다. 둘의 공통점은 소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성적 쾌감과 만나 멋진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미치도록 많은 촉수를 가진 관음증적 페티시스트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주로 탐닉하는 남성의 신체 부위는 손가락과 목젖, 귀털, 그리고 속눈썹 등 네 가지다. 우선 손가락은 내가 유난히 쉽게 미치는 신체 부위다. 길고 잘빠진 손가락은 남성의 특정 부위를 연상케 하기도 하고, 모성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선지 난 유난히 손가락이 예쁜 남자들과 잘 만난 편이고 그때마다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목젖 역시나 나의 페티시즘 욕망을 끓게 만드는 부위 중 하나다. 특히 남성이 침을 꼴깍 삼킬 때 엘리베이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복사뼈를 닮은 그 부위는 날 미치게 만든다. 목젖을 만지고 느낀다든가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가녀린 떨림만 보고 있어도 참 세상이 살맛난다는 느낌이 든다. 귀털은 내 사춘기 시절의 욕망과 연관이 있다. 유난히 하얀 솜털을 귀에 달고 다니는 착한 친구가 있었다. 햇살이 비칠 때면 그녀의 솜털은 반짝거렸고 민들레 홀씨처럼 훅 불면 어디론가 날아갈 듯했다. 영원히 잡지 못할 것 같은 그 아련함 때문에 나는 귀털을 사랑한다. 끝으로 속눈썹은 앞에 든 신체 부위들의 매력을 한데 머금고 있다. 그것은 모성애와 가녀린 떨림, 그리고 아련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요컨대 내가 보고 싶은 에로영화는 여성의 성감대를 부위별로 건드려주는 것들이다. 여성은 남성만큼 성감대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돼 있다. 그러므로 몸과 눈을 자극하는 다정한 일대일 서비스가 필요하다. 고로 기존의 남성 취향 에로영화들은 눈에서 성기까지 흥분을 모셔다주는 서비스 부문에선 매우 불친절하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의 입으로 여성의 가슴이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은 식상하기 짝이 없다. 매일 욕실에서 보는 모습인데 부감 혹은 앙각 등 카메라워크상의 장난이 새로워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남성용 코팩이 나온 지도 한참 지났는데, 여성 취향의 페티시 메뉴는 왜 이리 더디게 나오는지. 남성의 손가락이나, 목젖, 귀털 혹은 속눈썹이 에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멋진 에로영화 감독이 나왔으면 좋겠다. 손님 입장에서 다양하고 신선한 메뉴를 찾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