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더 우에이브>(1981)는 어느 미국 고등학교에서 역사과목 담임이 처음에 역사반에서, 나중엔 학교 전체를 실험실 삼아 독일 나치독재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교사와 학생들은 ‘훈련을 통한 권력! 행동을 통한 권력’ 등의 기본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 엄격하고 폐쇄적인 조직을 형성해 나치시대와 닮은 폭력 현상까지 드러낸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학생들은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잃고 인간성을 발로 짓밟아 야만인의 양상을 드러냈다. 즉, 인간은 그들의 인간성을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억제만 시키면 스스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최근 한 일간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한 대학교수가 10년 전 경제위기 때부터 한국사회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를 압축적으로 ‘기업사회’로 표현하고,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 불씨가 되었다. 사회가 기업 경영 모델과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는 것을 걱정한 것인데 이런 사회가 되면 기업지배가 불가피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경영논리 외에 모든 것들은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한 경영연구소 소장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시비를 걸어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전제로 개개인의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며 일종의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세계화의 신자유주의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준다며, 기업경영원리로 운영되지 않는 조직은 비효율적이고 부담스럽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 논쟁에 내용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논쟁에서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는 표현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장의 ‘반론’은 반론이라기엔 너무 맹목적이며 일방적 공격에 더 가깝다. 교수의 재반론에서 지적된 것처럼 핵심은 다름 아닌 사회가 생산성, 잉여가치, 효율성 등의 무조건적인 경영논리나 원칙에 복종하고 그것을 내재화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즉, 이러한 문제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가 어떤 것들인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이러한 논리에 빠지는 것부터 문제화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소장은 이러한 경고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인지 바로 그 함정에 빠져 경영논리를 절대화한다. 기업의 CEO처럼 옳음과 그름을 단지 생산성, 잉여가치,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결정한다. 그의 일방통행식 ‘반론’처럼 처음부터 대안에 대한 논의의 틈조차 배제하고 일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일단 기본논리를 약육강식의 상황강제(Sachzwang)에 복종시키면 나머지는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강간이 금지된 것은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모든 부문들을 절대적인 경영논리로만 보는 것도 분명 잘못이다. 영화 <더 우에이브>처럼 사람들이 ‘인간의 문법’을 발로 밟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막가는 것이다. 사람과 세상, 만물을 일회용 상품으로 여기는 이런 논리는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9호를 연상시킨다.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긴급조치 9호는 인간이 살기 좋은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문제제기조차 논의할 권리를 부정했다. 경영논리 절대화의 결과는 정말 보이지 않는 손의 독재기업사회일 거고, 그것은 인간없는 상품생산공장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영화의 끝부분에서 교사는 자기의 지도자를 기대하는 학생, 교사와 학부모들 앞에서 말없이 히틀러의 큰 사진을 들어올려 보여준다. 그러자 학생들은 큰 충격과 함께 마치 꿈에서 깨듯 그동안 감았던 눈을 뜬다. 영화의 관람객으로서는 행복한 결말이다. 하지만 기업사회는 실험도 영화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