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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명랑가족, 정윤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좋지 아니한가>
김현정 2007-03-01

옛사람들은 보름달을 보며 떡방아 찧는 토끼나 월궁 선녀의 자태를 발견하곤 했다. 그들은 달이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고 계수나무 그늘을 돌아가면 달의 뒷면이 보인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은 달의 뒷면을 눈여겨보고 있는 것일까.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지금 사람들 또한 달의 뒷면을 모르니, 남의 마음을 헛짚지 말고 간섭하지 말 것이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저 인정해주라고 말하는 영화다. 심씨네 다섯 가족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지 아니한가>는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잡아당기지 말고, 밀어내지 말고, 균형을 잡아보자. 이처럼 상쾌하면서도 아련하고 어딘지 서글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지 아니한가>는 또한 상당히 웃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궤도를 타고 도는 이들이 맞부딪치니 충돌의 재미가 만만치 않다. 고집스럽게 오각형을 이루는 다섯 꼭지점의 영화. 3월1일 개봉하는 <좋지 아니한가>를 미리 만났다.

밥을 먹을 때가 아니면 심씨네 툇마루는 외롭게 비어 있다. 조그만 벽장을 지어두고 홀로 처박힌 다섯 식구는 그 출구가 맞닿은 유일한 공간인 툇마루로 나오려들지 않고, 달을 보거나 어둠을 응시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며 그저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좋지 아니한가>의 영어 제목은 벽장 속의 해골을 뜻하는 <Skeletons in the Closet>이다. 제목을 정한 정윤철 감독은 “영어 속담에 ‘Every family has skeletons in the closet’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가족은 비밀을,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심씨네 가족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란 무엇일까. 무섭고도 더러운 치부 혹은 너무 소중하여 감추어야만 하는 보배일까.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가 찾으려 하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둔 비밀이 아닌, 달빛 아래 모여 앉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어떤 대답일 것이다. 심씨네 막내딸 용선은 불면에 뒤척이는 툇마루를 모른 척하며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국을 향해 묻는다. “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같은 집에 모여 살까요? 집에 들어오면서 매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 나는 늘 이 집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왜 옆집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걸까?” <좋지 아니한가>는 강아지풀 무성한 천변을 산책하며 곰곰이 그 답을 생각하는 영화다. “사실 이건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영화”라는 정윤철 감독의 설명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가깝고도 먼 가족이란 울타리 속을 들추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두 번째로 만든 <좋지 아니한가>는 스토리가 없다면 없고, 많다면 많은 영화다. 심씨네 다섯 식구는 제각기 자신만의 문제가 있어 좁은 마당이 우주라도 되는 듯이 서로 한없는 거리를 두고 유영을 하는 탓이다. 정리하기 곤란한 그 사연이란 대략 이러하다. 창수(천호진)와 희경(문희경)은 오래전에 애정이 식어버린 중년부부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창수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사이 억척스럽게 살림만 했던 희경은 노래방 미남 청년(이기우)에게 마음 설레어한다. 아들 용태(유아인)는 세살적 악몽 같던 기억과 초등학교 동창 하은(정유미)을 향한 짝사랑에 몸부림을 치고, 딸 용선(황보라)은 엉뚱한 영화교사 경호(박해일)를 좋아하게 되어 그의 장광설을 들으며 넋을 잃는다. 무협작가인 이모 미경(김혜수)은 얼마 전에 남자친구에게 차였지만 자신을 가꾸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추리닝을 배냇옷처럼 입고 다닌다. 행성이 거느린 위성들처럼, 자신만의 궤도를 맴돌며 결코 만나지 못하는 가족. 이들은 무더운 여름밤 조그만 연애사건을 두고 처음으로 운명공동체가 된다.

아주 우연히 <좋지 아니한가> 시나리오를 읽은 정윤철 감독은 재미가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달의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메타포로 사용한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달은 지구를 따라 공전하면서 자전을 한다. 그래서 지구에선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좋지 아니한가> 마지막에 용선의 판타지로 달의 뒷면이 떠오르는데, 그 순간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다 해도 정윤철 감독은 <좋지 아니한가>가 <말아톤>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경숙은 이십년이 넘게 초원이를 키웠지만 결국엔 그 아이에게 자신이 모르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손을 놓아준다. 사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는 이해가 아닌, 인정만이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끈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 값이 두배로 뛰어오르고, 건물이 무너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울증에 걸리고 말 거다.” 지구와 등을 지고 있어, 파랗게 얼어붙었을 것만 같은 달의 뒷면. 그 뒷면에 창수는 죽어버린 첫사랑을, 희경은 보바리 부인처럼 가볍게 들뜨는 춘정(春情)을, 미경은 소주를 마시고 쏟아내는 눈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길었던 일주일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목격하지는 못한다. 다만 눈치를 챈다. 태양빛 너머에 있는 뒷면의 존재를 느끼고, 살그머니 곁눈질을 해본다.

웃음 속에서 아련한 정서를 포착하다

정윤철 감독은 심씨 가족의 뒷모습을 비추어주기 위해 천리길처럼 머나먼 궤도를 따라 타박타박 걷고 때로 궤도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 발걸음은 지구 중력의 1/6밖에 되지 않는 달표면을 떠도는 듯 가벼우나, 그 눈길은 한숨으로 흩어지는 감정 한올 놓치지 않을 만큼 촘촘하다. 또한 느긋하다. 마치 노래방 총각으로부터 커피를 선물받은 희경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과도 같다. “첫 모금은 입 안의 잔여물을 없애주지. 두 번째 모금으로 입 안에 향이 퍼지게 한 다음, 세 번째 모금은 코로 향기를 함께 마셔봐.” 그러다보면 상피세포 사이로 커피 입자가 번져나가듯, 사각거리는 감정과 사연이 스크린 위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마도 가난 때문에 발레를 그만두었을 소녀가 발레리나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수풀 사이에서 춤을 춘다. 흔들리는 풀잎 사이로 애증을 오가는 소년의 첫사랑이 스민다. 그럼에도 정윤철 감독은 섣불리 간섭하거나 아는 척하려 들지 않는다. “<좋지 아니한가>는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고 남겨두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터넷 방송국 멘트 형식으로 깔리는 용선의 내레이션에 살짝 끼워넣었다. 너무 설명적이지는 않도록. 메타포로만 등장하던 달도 용선의 마지막 내레이션에 이르러 친근한 캐릭터가 되어간다. 그 장면에서 달이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지 않은가. “Welcome to my world… Step into my heart.”(<Welcome to My World>)라고 말이다.”

그 말처럼 <좋지 아니한가>는 상당히 웃기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문득 사물이나 순간에 머물며 아련한 정서를 포착하곤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외로운 툇마루에서 밥솥 뚜껑을 묶어두었던 허리띠가 툭, 하고 끊어진다. 용선이 살고 싶다고 오버하며 질주하는 골목길 끝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집이 기다리고 있다. 푸른 달이 크리스털 공 속으로 불쑥 들어온다. 밥솥과 집과 달은 생명이 없는 무기물이지만 그동안 심씨 가족을 지켜보다가 침묵으로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리와, 괜찮아, 뭐 이런 다정한 말들을. 그것을 정윤철 감독은 일상의 판타지 혹은 다른 각도로 보았기에 판타지처럼 보이는 일상, 이라고 표현한다. “<좋지 아니한가>는 캐릭터 자체가 현실에서 조금 떠 있는 것 같아서 판타지를 자제했다. 이건 맑은 지리국물 같은 영화인데 판타지는 향신료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데서 판타지의 느낌은 날 것이다. 벼룩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괴물처럼 보이듯.” 단편 <기념사진>에서 성수대교와 함께 수장된 소녀들이 찍지 못했던 기념사진을 만들어주고, <말아톤>에서 초원이를 사바나 초원으로 풀어주었던 정윤철 감독은, 여전히 판타지로 일상을 곱게 다듬고 언어로는 불가능한 위로를 전한다. 그는 섬세하고 예민하다.

꿈 그 자체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햇빛 사이에서 뛰어노는 먼지. 아주 작은 공간을 무한처럼 활용하는 이 먼지 같은 가족을 한데 보듬어 안는 공간은 전주다. <좋지 아니한가>가 담아낸 전주는 그곳이 고향인 사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낯설지만, 그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도 데자뷰를 느낄 만큼 낯익다. 정윤철 감독이 전주를 선택한 이유는 완산구와 덕진구를 가르며 흐르는 전주천 때문이었다. “처음 시나리오는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할 부분을 대사로 때우고 넘어가 TV단막극 같은 느낌이 강했다. 영화적인 감정의 폭발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아, 하천에서 패싸움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하천이 필요해졌는데 전주는 천변도 마음에 들었고, 최첨단 도시와 시골이 공존하는 느낌도 좋았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하천은 대부분 너무 지저분하거나 양재천처럼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데 전주천은 달랐다.” 건너편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조그만 전주천 주변은 산만하고 다정하다. 살짝 잡으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는 강아지풀이 서로 엉키고, 질경이와 유채꽃과 이름은 몰라도 눈에 익은 풀들이 무성하다. 그 냇물가에서 심씨 가족은 하나가 되지도 않고 산산이 흩어져버리지도 않는다. 그저 어지럽고 산만하게 문패 하나로 묶인 느슨한 무언가가 된다. 굳이 말하자면 가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찌어찌 패싸움 와중에 도망나와 살아 돌아온 용선은 인터넷 방송을 한다. “너무 세게 또는 너무 약하게 잡아당기지 않는 한 계속 지구는 외롭진 않을 거고, 그럼 제 방 창문에선 늘 밤하늘의 달을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언제까지나 그 절반은 숨겨진 미스터리일지라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구와 달만큼, 서로 놓아버리지도 충돌하지도 않을 그만큼,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면. 그러나 세상은 집착과 욕심과 위선을 접착제 삼아 버티고 있다. 정윤철 감독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영화를 찍었다고 했지만 그 실용적인 대답이란 또다시 도달 불가능한 꿈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꿈이란 그 자체만으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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