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아마도 2005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그야말로 주목받은 때부터일 것이다(짐 호버먼은 그해의 발견이라고 했다). 이후, 낯선 루마니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영화제를 돌며 환호받았고, 2006년 말쯤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걸작 중 한편이 되었다. 이건 크리스티 푸이유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를 광고하고자 억지로 길게 쓴 서두가 아니다. 라자레스쿠 단테 레무스는 이웃의 소리가 훤히 들리는 아파트에서 고양이 몇 마리와 사는 62살 노인이다. 음주와 괴팍한 성격 탓에 누이와 딸로부터도 관심을 얻지 못하는 그는 나흘째 계속되던 두통과 뒤따르는 구토 증세를 못 이겨 앰뷸런스를 부른다. 그의 부름에 오십대 구급의료사 미오아라가 뒤늦게 도착하면서 두 사람은 밤 열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밤으로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문제는, 밀려드는 응급환자 때문에 지친 의료진과 병원들이 알코올중독자로 보이는 노인을 서로 떠넘기는 가운데, 미오아라를 제외한 그 누구도 노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마침내 네 번째로 찾은 병원에서 경뇌막 혈종 제거를 위한 수술이 결정되지만, 라자레스쿠는 의식을 잃은 지 오래고,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닦고 면도하는 과정은 죽음에 이른 자를 위한 의식처럼 보인다. 두 시간 반 동안 실시간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새벽의 빛과 어둠의 나락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그렇게 끝난다. 비록 감독은 TV드라마 <ER>에서 영감을 얻었다곤 하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은 환자와 의료진 등 지친 인간의 얼굴을 가까이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다. 여기엔 그럴듯한 드라마나 기적의 의술이라곤 없다.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을 의료 서비스에 대한 비판으로 읽든, 외롭게 죽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으로 읽든, 삶에 부대끼는 인간을 그린 드라마로 읽든 그건 각자 다르겠으나, 그 누구도 영화의 완성도를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죽어가는 남자가 마주한 지옥도 같은 상황이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슬픔은 다른 영화에서 느끼기 힘든 것이다. 영화의 미국 배급과 DVD 제작을 맡은 타튼사는 원래 영국에 기반을 두다 근래 미국으로 진출했는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영화와 호러영화 및 예술영화의 배급과 DVD 출시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는 곳이다. 소리의 현장감이 인상적인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DVD는 부록으로 감독 인터뷰(46분), 미국 건강관리 시스템에 대한 조망(12분)을 수록했으며, 별도 제공되는 소책자는 영화평과 인터뷰를 엮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