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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2개 ‘국어’
정희진(대학 강사) 2007-02-09

몇년 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교환학생으로 서울에 온 재일동포 3세 여성과 강의를 같이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는데, 며칠 전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가 주최한 ‘한일여성지식인교류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한국어로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가왔다. 재외동포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말도 못하면서…”식으로 무시, 비난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도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내심 겁이 났다. 그녀에 의하면 내가 당시 한국어로 말하다가 중간에 “아리가토(고마워)”라는 일본어를 사용했는데, 그 말이 자기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때는 저를 너무 미워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그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언어(생각)가 없으면 상투적으로 말하게 된다. “저도 영어를 못 알아들어 비참한 적이 많은걸요”, “꼭 한국어를 잘해야 한국 사람인가요, 뭐”, “한국은 당신이 그렇게 동일시할 만한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등등 정말 얼토당토않은 횡설수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다행히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외국어든 인기 스타의 말투든 전문 분야의 지식이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든 사람마다 욕망하는 말이 있다. 특히 서양 제국으로부터 식민지를 겪은 사회에서 영어나 불어의 이미지처럼 권력자의 언어는 아름답고 고상해 보인다. 자신이 동경하는 언어, 지배(hegemony)적인 의미를 갖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나는 식민주의에 대한 개념 중에 “식민지 사람은 2개 언어를 해야 한다”는 프란츠 파농의 정의를 가장 지지한다. ‘식민지 사람’은 지배자의 언어와 자기 언어, 두개의 언어를 배워야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언어만 하면 된다. 지금 우리의 일상처럼 한국 사람들은 평생 영어의 강박에서 헤어나기 어렵지만, 미국인 중 한국어를 못해 우리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은 한국사람 중에 ‘방글라데시’ 말을 못한다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서울 사람은 ‘지방’에 관심이 없지만, 지역 사람에게 서울은 늘 어떤 준거로 작동한다. 두개의 언어를 강요당하고 또 실제로 구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능한’ 사람에게 우월감을 느끼기는커녕 늘 ‘오리지널’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린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원서 강독’ 수업은 그러한 실천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혀(tongue)의 의미는 말, 즉 말은 몸을 뜻한다. 말을 배운다는 것, 남의 목소리를 자기 몸속에 울리게 하는 것은 당연히 고통을 동반한다. 우리가 ‘모국어’를 비하하고 외국어를 배울 때 자신의 무능을 탓하긴 하지만, 위에 말한 재일동포 여성의 “나를 미워했다”는 자기 부정의 감정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녀의 고통은 남자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로 살려는 여성처럼, 이성애자 나라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처럼, 비장애인 나라에서 정상적인 몸의 범주를 질문하는 장애인처럼, ‘본래의 자기’ 언어를 가장 늦게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겪는 겹겹의 자기혐오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부정하는 논리가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 포위당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따로 나라를 세우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부정하지 않고 설득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지만 동시에 그 정체성이 만들어진 경계의 임의성을 다시 질문하는 것, 즉, 이들에게 ‘자기 찾기’는 경과점이지 도달점이 아니다. 이러한 작업은 이중(다중) 정체성을 유지할 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주류로의 동화와 지배로부터의 독립은 같은 정치학이다. 부정되어온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타고난 한국인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운다면, 재일동포는 영원히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게 된다. 국민 정체성이 재일동포 같은 경계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외/국어’를 못하는 우리 자신을 좀 덜 미워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