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일까? 무쓸모 의심은 무쓸모 행동을 낳았다. 몇해 전 누군가가 “뉴욕에서는 ‘호모’라는 말이 쿨한 말이 됐대”라고 말하자, 나의 언어생활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호모”라는 말을 쓰기가 다반사. 처음엔 이랬다. 한국사회의 언어생활이 그래도 교정돼서 상식이 있는 사람과 매체라면, 더이상 ‘호모’라든가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자(아직도 쓰는 용감한 분들도 있다), 괜히 반감이 일었다. 이건 너무 쉽잖아, 말이 바뀌면 뭐하나 진심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렇게 ‘게이’라는 말에 묻은 겉치레 시민적 상식에 짜증이 났었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했지만 진심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혐의를 품었다. 그러니까 때이른 언어의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포장하자. 정치적으로 포장을 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체하는 자신에 대한 조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해야겠다. 물론 남들과 같아졌다는 짜증이 2할, 쿨하다는 잘난 체가 8할이었다. 이렇게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되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지루함의 증거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유행이 되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신념에 근거해 서로를 슬며시 ‘야렸다’.
말은 무섭게 달린다. 말은 금지선을 넘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꾸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의 말과 너의 말이 오가면서 더욱 무섭게 달렸다. 그래서 이제는 몇 가지 문제성 발언은 입에 익어서 엉뚱한 장소에서 심란한 단어를 뱉어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순간에 말을 뱉고서 ‘정말로 입조심해야지’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물론 말맛을 살린다는 나름의 취지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는다. 물론 반성의 순간도 있었다. 아직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를 용인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에 면죄부를 주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경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딜레마에도 부딪힌다. 심야의 사무실,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 묻는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신윤동욱입니다.” “아, 네 신윤동씨요.” “아니… 어머니 성을 같이 써서 이름이 네자고요. 신.윤.동.욱. ….” 이름을 끊어서 말하며 과연 잘하는 짓일까, 회의도 생긴다. 기자일의 특성상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낯선 고령자에게 이름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도 난감하다. 그래도 몇번을 “신윤동욱”이라고 반복하다 상대가 “신윤동? 신동욱?” 하면 대충 “네” 해버린다(포기도 따지면 나이 차별이다). 융통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설득할 용기가 없어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아니 가능한 것인가, 생각에 빠진다. 정치적 올바름의 코드를 전혀 모르는 카자흐스탄 킹카 보랏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몹시도 웃긴 일이라는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의 설정처럼. 생각해보니 웃기다. “여자의 뇌는 다람쥐만하다”고 말하는 카자흐스탄 킹카 보랏에게 부모성 같이 쓰기를 설명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랏!
나의 언어생활에는 몹시도 관대하지만, 남들의 언어생활에는 여전히 깐깐하다. 어쩌다 “동성연애자”라고 쓰여진 활자를 보면 짜증이 치밀고, 심지어 라디오에서 “장애우”라는 말이 들려도 귀에 거슬린다(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장애우’라는 표현에는 타자화의 느낌이 있어서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의 ‘장애우’라는 표현의 애용에는 언어로만 장애인을 대접하는 현실이 강하게 겹친다. 우리가 장애인 복지에도 그만큼 깍듯한가). 서너해 전, 경찰서 기자실에서 들었던 어떤 기자의 말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다수인 사람들한테 ‘비’자를 붙이는 게 말이 돼. ‘비장애인’이 뭐야.” 그는 들으라는 말이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투에서 풍겼던 주류의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도 방송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고 리포트는 했겠지. 질문을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다. 외국인을 만나서 짧은 영어와 무의식을 알리바이로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놓고, 국적차별 아니야,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섬세하기가 어려워, 강박에서 슬쩍 풀어놓는 잔재주를 부리지만,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반성을 부른다. 이렇게 강박과 위반과 반성의 교차로에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