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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역사의 데칼코마니, <창문을 마주보며>

EBS 2월3일 밤11시

결혼 9년째, 남편과 아이 둘을 둔 지오반나(지오바나 메조기오르노)의 삶은 메마르다. 남편과의 사랑은 예전과 같지 않고 아이들의 존재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제빵사가 되고 싶은 꿈을 미룬 채, 공장 회계사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도 힘에 부친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창문을 통해 건너편에 사는 남자를 지켜보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남편이 데려온 다비데(마시모 지로티)와 만나게 되면서 그녀의 건조한 일상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다비데를 돕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훔쳐보던 로렌조(라울 보바) 역시 자신을 흠모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창문을 마주보며>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가슴에 사랑을 품은 남녀가 마주보고, 과거와 현재가 마주보고, 역사와 사랑의 감정이 마주보는 순간을 서정적으로 품고 있다. 다비데와 지오반나가 반죽을 겹겹으로 쌓은 뒤, 그 위에 초콜릿을 발라 하나의 케이크를 만들어내듯, 다비데의 기억과 지오반나의 현재가 촘촘하게 서로에게 녹아들며 이야기의 구조를 완성한다. 그래서 다비데의 대사 속에는 지오반나의 감정이 실려 있고, 지오반나의 현실 속에는 다비데의 과거가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속에서 비극적인 끝을 맞이한 다비데의 동성애는 시공간을 건너뛰어서 가정을 버리는 대신 결국 사랑을 버린 지오반나의 ‘불륜’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지오반나와 로렌조는 다비데가 남긴 편지나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서로에게 전하며 다비데의 언어를 통과하여 사랑을 고백한다. 지오반나와 다비데가 춤을 추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아름다운 장면에서는 죽은 연인에 대한 다비데의 애틋한 마음과 지오반나의 외로움이 겹쳐진다.

창문을 통해 사랑을 시작한 남녀의 불륜이 관음증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의 ‘창문’이 단순히 상대를 훔쳐보는 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오반나가 로렌조의 창문을 볼 때, 그녀는 로렌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보아야 한다. 그 창문에는 사랑을 갈구하는 내면의 욕망뿐만 아니라, 잊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함께 비친다. 더이상 좁혀질 수 없는 짧지만 깊은 창문 사이의 거리. 그래서 영화는 불륜의 격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사랑이 스스로 쓸쓸하게 좌절해가는 과정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참고로, 이탈리아 최고의 흥행 기록을 수립한 <창문을 마주보며>에는 이 작품을 끝으로 고인이 된 마시모 지로티의 마지막 빛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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