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花>는 <영웅>이나 <연인>에 비해 육중하다. 육중함이란 규모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물들의 관계를 휘감은 비극의 공기를 장이모가 장인의 풍모로 표현해냈다는 뜻이다. 그 점을 양식적으로 체화해낸 배우들(특히 주윤발)의 몫도 컸다. 장이모가 추구하는 점 중 하나인 하이테크적 탐미주의의 믿음은 몹쓸 만큼 더 강성해졌지만, <황후花>는 <영웅>이나 <연인>이 담지 못했던 비극성을 둔탁하지만 힘있는 골격으로 갖추고 있는 영화다. 중국 내에서는 엄청난 흥행 기록도 세웠다. 그 점에서, 장이모는 <황후花>가 중국 ‘상업영화’의 미래를 보장하는 보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지금 블록버스터가 중요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를 계속 찍을 생각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의 이 말을 어느 정도 진의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는 과연 하이테크 블록버스터로 지은 천년왕국에서 불사를 꿈꾸는 황제로 남을 것인가, 중국 영화시장을 바로 세우고 홀연히 예술의 사막으로 걸어 들어갈 영웅적 무사의 길로 돌아설 것인가. 서울에서 그를 만나 <황후花>를 중심으로 그 생각을 물었다.
-<황후花>는 조우의 희곡인 <뇌우>가 원작이다. 거기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나. =그건 중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캐릭터도 모두 흥미롭다. 하룻동안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 이야기를 인물들의 갈등관계가 첨예한 영화로 옮기면 매우 흥미로울 것 같았다. <뇌우>는 1920∼3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데 부유한 한 가족의 가족사이지만 중국의 봉건문화, 시대상, 사회의 압제 등을 반영하고 있다. 그중에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도 있다. 그동안 내가 만든 영화들이 많은 부분 여성의 비극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들과의 연결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황후花>에서 황후라는 여성 캐릭터가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걸 꼽자면 주윤발이 연기한 황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윤발을 황제로 정해놓고 썼다. 그가 맡은 황제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권력과 권위를 한손에 쥐었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다. 그 때문에 가장 고독한 인물이다. 영화 후반부를 보면 실패자로서의 그의 모습이 뻔히 드러나는데도 그는 마치 혼자서만 자기가 뭔가 성공한 것처럼 가장한다.
-<뇌우>는 중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그걸 당 시대의 황궁이라는 절대 지배층의 암투극으로 옮긴 계기는 뭔가. =<뇌우>에 들어 있는 각각의 가족 캐릭터를 황실로 옮겨놓으면 훨씬 더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대로 기억된다. 그 화려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냄으로써 비극성을 부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극을 부각하는 방법이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비극이 화려함 안에 있을 때 그 비극의 의미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봤다.
-한국에서의 개봉 제목은 <황후花>이지만, 중국에서의 개봉명은 <황금갑>이다. =그건 당 시대의 시 한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성에 황금 갑옷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당대 후기에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그 농민 봉기를 소재로 하여 쓰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봉기한 사람들과 관련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국화 또한 저항의 상징이다.
-이상하다. <황후花>의 내용은 농민 봉기와는 큰 관계가 없지 않나. 황실 가족의 개인적 갈등과 비극에 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민 정신이나 농민 봉기에 관한 건 아닐지라도 당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왕비의 결심이 있고 그녀가 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황후가 절대 권력자인 황제에게 저항한다. 물론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이야기, 황족의 이야기다. 그 밖의 외부의 무언가를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시대와 문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페라를 연출한 경험이 이 영화의 연출에도 영향을 끼쳤나. 마치 대작 오페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영향을 끼친 건 아니지만 원래 무대극을 변형시킨 것이니 그런 느낌을 받을 만하다.
-상연 무대를 영화의 미장센으로 바꿨다는 말인데, 그때 어디에 주안점을 뒀나. =영화는 영화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다고 본다. 가령 전쟁장면은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큰 규모의 움직임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영웅>이나 <연인>에 비해 규모가 더 커진 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 이 영화의 큰 매력은 비극적 서사를 풀어낸 그 방식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 <영웅>이나 <연인>에 비해 인물의 비극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 두 영화에 비해 이번 영화는 캐릭터의 성격 묘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캐릭터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고 할 수 있다.
-황금색이 주요하게 쓰이는데, 고증에 의한 묘사에 많이 의존했나 아니면 상상적 개입이 많은 편인가. =중국에서 황금색은 황제, 즉 제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당 시대에도 이런 황금색이 쓰였냐는 질문인 것 같은데, 당 시대는 가장 화려한 때라고 역사서에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정확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부분 개인적인 상상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 자료와 당 시대의 시 등을 토대로 했다.
-인물들의 의상은 화려한데, 엉뚱하게도 그게 언뜻 <스타워즈> 같은 할리우드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배우들이 입었던 모든 의복은 우선 역사적 고증에 기초했고, 거기에 나의 상상력을 덧붙였다. 그 밖에도 중국의 특색이 많이 들어가 있다.
-중국적인 것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런 요소가 없었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두고 인터넷상에서 토론이 활발했는데, 가령 영화에 출연하는 궁녀들의 차림새에 관해서 일반인은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했지만, 전문가들은 그 당시의 여성미를 묘사한 시를 예로 들면서 이것이 전적으로 역사에 부합한다는 평을 내렸다.
-그동안 당신의 영화는 과장된 표현으로 중국적인 것을 오인하게 한다고 비판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의 기호가 다 같을 수는 없다. 표준은 없는 거다. 특히 중국인은 그 수가 엄청나게 많지 않나. (웃음)
-<황후花>가 중국영화 상업 시스템에서 일종의 건설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차원의 말을 한 적 있다. =정확히 그런 표현은 아니었지만, 현재 중국 영화계를 보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은 불법 DVD, 인터넷 다운로드 등이 판을 치고 있다. <황후花>는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에 DVD나 다운로드해 보아서는 충족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관객을 극장으로 끄는 힘이 있다. 다만, 다른 영화들이 장르적으로도 다양해지는 건 나 역시 바라는 바이다.
-한편으론 수긍하기 어려운 대답이다. 그 말대로라면 앞으로 중국영화는 상업적 해결을 얻기 위해 점점 더 큰 규모의 볼거리 영화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건 현 상황에서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블록버스터를 계속 찍을 생각이 아니다. 예를 들면 두편의 예술영화를 만들 시간을 모두 쏟아부어야 가능한 게 이런 영화 한편이다.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영화에 대항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황후花>가 일종의 범아시아적 상업영화의 모델이라고 보는가. =글쎄,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시아는 워낙 크고 그중에서 나 말고도 대표가 될 만한 감독은 얼마든지 많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