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에 사주카페가 성업 중이라고 한다. 고객의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받은 20~30대라고 한다. 점치는 성향은 대략 학력과 반비례하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역술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한국에서 가장 점을 안 치는 부류는 농부들이다(어부나 광부도 마찬가지일 게다). 가장 점을 자주 보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들이다(정치가나 연예인도 여기 속하지 않을까?). 그에 따르면 점치는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결정적 변수는 학력이 아니라 직업의 성격이다. 나는 이 경험적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농부가 점을 안 치는 건 점을 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노동의 성패는 자신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 변수가 있다면 돌발적인 기상 상황이다. 이 사태는 농부 개인의 힘으로 예방이 어렵다. 그래서 농부는 미래를 알고자 하는 대신 좋은 미래를 무작정 기원한다.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우제는 일종의 기도이다. 하지만 사업가나 정치가는 노동의 성패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 그리고 부침이 심하다. 당연히 불안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에 의지하는 농사와 달리 사회관계에 의지하는 생업의 속성상 자신의 처신이 미래의 사태를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기 쉽다. 역설적이지만 나의 처신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최적의 처신에 대한 강박이 깊어지고 실패에 대한 불안도 깊어진다. 그러니 안개 자욱한 교차로에서 효율적 처신의 길을 묻는 사업가가 점괘를 갈구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사업가에게 점은 수정 가능한 미래를 내 손으로 기획하고자 하는 계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점집을 찾는 모든 사람이 사업가처럼 현실적 지침을 찾는 건 아니다. 박사학위 소지자인 아줌마 Y양은 건강검진받는 빈도보다 좀더 자주 점집을 찾는다. 그녀는 점집을 옮겨다니며 과거에 대한 해석과 미래의 전망을 탐문해왔다. 그녀가 자주 점집을 옮기는 것은 사주풀이의 진실성에 대한 비교확인의 동기도 있지만, 자신이 들은 스토리의 수준이 양에 차지 않아서이다. 그녀가 듣고 싶은 ‘풀 스토리’는 그간의 불운을 팔자로 환원하고 미래의 희망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주는 상투적인 해피엔딩의 드라마이다. 나는 그녀의 비합리성에 대해 힐난조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사주풀이를 하는 것이 내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겐 도움이 된다. 듣고 싶은 얘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대가로 나는 돈을 지불한다. 사주풀이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남자들이 폭탄주 돌리는 것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무해하다.” 그녀에게 점은 위안의 해석학일 뿐이다.
사주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젊은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언제나 하나의 역할과 기능으로만 자신을 호명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건 마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 속 세트에서 사진 촬영을 하며 영화 속 판타지를 잠시 체험하는 즐거움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종종 사주카페를 비합리성의 온상처럼 보는 글을 접할 때가 있다. 거기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을 한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이도 있다. 나는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것보다 그걸 비과학적 태도의 상징으로 보는 편협한 사고가 더 한심해 보인다. 합리성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도구적 가치이지 삶을 위한 가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합리성을 인간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본원적 가치로 전제하는 것은 아마도 고용자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고용자의 눈에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청춘들은 효율적 생산을 위해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할 시간을 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게다. 고용자의 눈은 애초에 제도 속의 인간이 아니라 제도의 효율적 작동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도 아니면서 고용자의 눈을 가진 사람들, 어찌 보면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놓쳐버리는 가장 가련한 외눈박이일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사주카페를 차디찬 합리성의 세계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잠시 녹이는 화로로 봐주는 사소하고 따뜻한 눈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