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성 학자의 미국 유학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매우 총명한 동료 여성 과학자 집에 초대받은 그는, 그녀 파트너의 빼어난 음식 솜씨와 손님 맞는 태도에 감탄한다. “그래, 저렇게 매력있는 여자랑 살려면 남자가 요리 정도는 해야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분노로) 흥분했다. 요리, 설거지, 청소는 ‘매력적인 여자랑 사는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 남녀 불문한 인간 생존의 전제인데 남성이 대단한 봉사를 하는 것처럼 묘사해서가, 아니다. 내 주변 경험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지적으로 뛰어나거나 경제적 능력이 있을수록 더욱 죄스러운 마음으로 남편 기죽지 않도록 가사에 충실해야 한다(<한겨레21> 임경선 칼럼, “일하는 아내들 ‘눈물의 부르스’” 참조).
고정희의 시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남자는 사나운 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자는 움직일 필요없이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자의 기분과 이익만이 법이요 정의인 사자의 울타리에서, 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 졸이고 눈치보고 비위 맞추면서 끊임없이 사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자가 되는 길’이다. 사회, 학교, 가정, 국가, 지구촌.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여자가 남자에게 맞춰야 하는 한 남성은 “네 탓이오” 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는 추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사자 우리 안에서 변해야 할 것은 세상과 여자들이지 사자는 자아 구조 조정의 고통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흑인이 흑인으로 사는 한 백인이라는 범주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구를 숭배하는 비서구가 서구의 권력을 지속시켜주는 것처럼, 남자를 남자이게끔 만드는 것은 여자다.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의 ‘성매매 예방 다짐 릴레이’ 캠페인이 충격이었던 이유는, 일부 남성 여론과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구매자 취급”해서가 아니라 여성부가 앞장서서 남성을 ‘사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식 뒤 성매매 업소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정부가 회식비를 지원하겠다니! 이미 여성부는 정치권, 언론 할 것 없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지만, 사실 여성부 비판 세력과 여성부의 아이디어는 동일하다. 이 이벤트가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이나 너무나 남성 중심 질서에 익숙하여 이미 불법인 성매매를 안 하면 돈 주겠다는 여성부나 ‘남성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여성부가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쓰는 여성들 모임이나 여성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회식비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은 들어본 바가 없다).
성매매는 성문화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 사고 체계의 핵심이다. 성폭력, 성희롱, 남성의 성 콤플렉스, 여성 비하는 모두 성매매를 정점으로 하는 변종 문화들이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간접적, 실질적 성구매자다. 그 자장 안에서 자유로운 남성은 없다. 직접 성구매를 하지 않거나 혹은 성적으로 ‘점잖기만’ 해도, 남성은 여성의 호감을 산다. ‘나쁜 남자’가 너무 많으면, 그들 덕에, 조금만 그렇지 않은 남자도 아무 노력없이 저절로 ‘좋은 남자’가 된다. 남성 연대 정치의 기본이다.
아내폭력, 강간 등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의 몸을 상품으로 구매, 중개하는 행위를 범죄화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한국사회에는 인신 매매 금지를 “행복권 침해, 인권 탄압, 성욕 억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이고, 이런 생각이 상식으로 통용된다. 이번 사건은 여성부조차 이들의 주장에 공감한 나머지 이러한 ‘반사회적 선전선동’을 처벌하기는커녕 달래고 비위 맞추면서 안 하기만 해도 국민의 세금으로 보상, 칭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여성부의 발상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남성과 일상을 함께하는 여성들은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남성이 당연히 해야 할 가사나 ‘비본질적 업무’를 ‘시키기’ 위해 남성에게 구걸, 협상, 애원, 요구, 협박, 애교 등 모든 전술을 동원하고 그 유연한 사용 방법을 골몰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아니면, 그건 정말 피곤하고 긴장되는 일(사자와 같이 사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속 편하게 혼자 다 처리해버리고 만다. 여성부 정책이 대한민국 여성의 신세에서 크게 벗어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