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의 질주>란 영화는, 아주 단순한 '액션' 영화다. 총싸움이 등장하기도 하고, 대형 트럭에 매달리는 스턴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장면은'질주' 그 자체에 집중한다. 얼마 전 개봉했던 <드리븐>은 카 레이싱을다룬 스포츠영화였다. 4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승부'를 둘러싼 인간군상의 희노애락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식스티 세컨즈>는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우선이다. 차를 보는 순간 '그녀'라고 부르며, 마치 진한 포옹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악셀을밟는다.
그건 애정이고, 집착이다. 속도를 올려가며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그녀와 하나가 된 느낌을 받는다. 그게 좀 병적으로 나아가면 <크래쉬>같은 영화가 된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로 되는 순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피안의 공간. 그러나 <분노의 질주>는 오로지 카타르시스다.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는 것,이디론가. 미래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하여튼 가야만 한다. <드리븐>의 배경음악으로는 주로 테크노가 깔린다. 웅웅거리며 다른 공간으로 청자를 몰고 들어가는 음악. 60년대의 사이키델릭 파티가 정신적 고양을 꿈꾸었다면, 요즘의 레이브 파티는 육체적 일탈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수입사에서 처음 번역 제목을 '스피드 메탈'이라고 붙였던 것처럼, <분노의 질주>의 배경음악은 힙합과 메탈이다. 특히 질주 장면에서는 메탈에 기울어진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때려부술 듯한 금속성의 메탈은 스피드광에게는 최고의 음악이다. 쏜살같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몰면서, 어덜트 컨템퍼러리를 들을 순 없지 않은가. 그 스피드에 열광하지 못한다면, <분노의 질주>는 뻔한 조금 한심하기조차 한 청춘영화다. 하지만 그'스피드'에 혹하지 않는다면 과연,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0년도 전에, 박흥용의 단편 를 보았다. 그 때는 나도 청춘의 한 켠에 있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한 청년이 오토바이에 미친다. 스피드에 사로잡힌다. 현실에서는 배달부에 불과하고, 세상과는 오로지 불화뿐인 나약한 청년은 오토바이를 만나, 초월을 꿈꾼다. 그가 말하기를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르고, 맞바람으로 느껴지는 세상의 기운이 다르고. 그에게 유일한 출구는 오토바이였고, 스피드였다. 그리고 기꺼이 출구로 나아간다. 그 만화를 보면서 동경은 했지만, 나는 오토바이를 사지는 않았다. 그건 마약 같은 것이었다. 흔히들 그런다. 마리화나나 코카인 등을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그 황홀경을 잊지 못해 언제나 마약에만 매달린다고. 그 '중독'이 못 미더워서, 아니 두려워서 나는 마약을 멀리 한다.(그러나 나는 마리화나 정도는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마합법 옹호론자다. 대마보다는 차라리 술의 해악이 더 크다고 생각 한다.) 그 후 자동차를 몰게 된 후, 나는 16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내 봤다. 하지만 크게 감흥은 얻지 못했다. 늘 그렇게 속도를 내서 달려보고 싶은 욕망도 그다지 없다. 그러나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가 존재하고, 30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낼 수 있는 차가 있다면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탈출구라면, 한번쯤은 시도해볼 만한 것이다. 지금이 나이에도. 그러나 그건 쉽사리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오토바이광의 만화인 <기린>에는 포르셰와 속도 경쟁을 벌이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지만, 회복한 후 똑같은 사고를 반복하고 죽음을 택한 청년이 나온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달려야만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 종착점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종착점은 커녕 반환점조차 오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무릎꿇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건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젊은 그에게는. 사실 <분노의 질주>를 보고 나서, 아니 계속 '질주'를 보면서 조금씩허탈해졌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결코 굴복하지 않고, 비밀경찰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면서 지키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어딘가로 떠나가서, 다시 '질주'에만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것을 과연 '초월'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60년대의 히피들이 쉽게 종교적 황홀경에 빠져던 것은 그런 이유일 수도 있다. 어떤 믿음이 없다면, 그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딘가로 끊임없이 달려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60년대는 끝났고, <아이스 스톰>의 70년대가 닥쳤고, 21세기에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처럼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과연 <분노의 질주>의 아이들은 어디로간 것일까? 그 질주의 끝을 그들은, 언젠가 만날수 있을까.김봉석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