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있고, ‘그렇게만 봐라’는 권력이 있다. 이 힘에는 저항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너무나 은밀하게 우리의 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여기 맞서는 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어떤 게임의 제작이 발표되면 곧장 이 권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게임 전문 잡지들이 직·간접적으로 이해를 공유하는 작품을 띄워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 게임은 명작이고 걸작이고 대작이다. 이 게임에 대해 나쁜 평을 하는 건 바보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너무 노골적인 경우가 많아서 이런 수법에는 잘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시되면 이제 홍보전이다. 어떤 게임은 ‘홍보’를 통해 존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어떤 게임은 ‘홍보’가 없어서 분명 존재하는데도 보이지 못한다. 전통있는 시리즈물이라든가 유통사가 돈이 많다든가 개발자가 유명한 사람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몇몇 게임이 선택된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홍보물이 매체를 가리지 않고 난무한다. 하지만 많은 게임이 잡지 광고 한번 내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심지어 ‘가람과 바람’이 만든 <씰>처럼 유통사에서 홍보자료를 달라는 걸 거부하는 경험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게이머의 몸에 각인된 권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짊어진 역사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사물은 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좋았던 시리즈가 변해가고 있는데도 과거에 각인되었던 기억에만 의존한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이하 파판)는 게임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다. <파판>의 팬들은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공감대를 가졌다. 하지만 요즘 와서는 명성이 쇠퇴하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8편의 여주인공 ‘리노아’는 저항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설정과 너무나 동떨어진 캐릭터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파판>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는 조금의 흠집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전편의 안 좋았던 기억 때문에 새로 나온 시리즈에서 흠집만 잡으려고 혈안이 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의 라이벌에 대해서는 무조건 트집부터 잡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 모든 것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관심법을 쓸 수 있다. 얼음산을 넘고 바늘언덕을 지나 불의 강을 건넜다면 게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그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쌓인 기억들에 의지해 게임을 읽는다.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과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같은 게임을 다르게 한다. ‘게임’이란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와 처지에 따라 모두 다르게 독해한다.게임을 보는 건 눈과 귀에 들어오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자신의 삶 속에 끼어드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만의 코드 속에서 연결시킨다. 쉽지 않은 일이고, 다른 사람의 코드에 접속해서 자기 마음대로 재배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창조된 게임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고, 다음에도 다른 게임을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