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만 전 <9시 뉴스>에서 10만원짜리 화폐 도입과 관련해 검은돈 거래가 더 쉬워진다며 한 남자가 “007 가방”에 돈을 넣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원래 표준어에 고집이 센 한국방송 뉴스가 ‘서류가방’이나 ‘가방’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국어사전에도 찾을 수 없는, 할리우드영화에서 나온 대명사를 붙여 그 첩보원 캐릭터와 연관시켜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친구에게 들은 것처럼 예전에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원시적인 반공영화 외에 중학생 이상의 학생들에게 ‘똑똑한 반공영화’인 007 영화가 권장 단체관람영화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대중과 007은 정말 친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실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나라에서도 TV나 영화관이 있는 곳 어디서나 007의 ‘멋’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단, 북한을 대상으로 한 <007 어나더데이>(2002)는 한국인들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또, 최근에 개봉한 <007 카지노 로얄>은 특히 촌스럽게 생긴 금발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와 그의 본드 캐릭터 해석에 대한 불만이 크기도 했다. 필자의 생각엔 새 본드의 가장 큰 문제는 머리카락 색깔보다도 본드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고 본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인간적인 면이 크게 문제가 된 또 다른 영화가 <몰락>(2004)과 <그때 그사람들>(2004)이었다. 전자가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인간적인 남자로 묘사할 수 있는가’이었다면, 후자는 한국에서 ‘어떻게 박정희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여자, 술과 일본에) 약한 남자로 묘사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하지만 오히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타락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지, 또한 그렇게 된 상황을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라고 본다. <광란자 잭>(1988)에서 여성 살인자 잭의 존재가 아니라, 여성을 살인하게 되는 사회현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007 카지노 로얄>로 돌아오자. 여기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본드를 남자로 보면 문제점보다 훨씬 나아진 많은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엔 ‘유부녀를 선호한다’면서 잘난 척했지만, 일단 베스퍼와 사랑에 빠지자 양처럼 얌전해지고 그에게서 속임까지 당할 정도로 갑옷을 벗고 부드러워진다. 본드를 노동자로 보면 소련이든 북한이든 옛날과 같은 냉전 표적이 아닌, 누구나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테러리스트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본드는 성실하고 영웅적인 영국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브레히트가 말한 ‘사천의 선인’일 뿐이다! 본드가 대표하고 미화하는 가치관을 따진다면, 원작 시대인 1953년의 말로 표현하면 부강대국이고,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관 그것이다. 특히, 제국 중의 제국이었던 영국 안기부는 이른바 ‘제1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작용’으로 생기는 ‘주변’의 대항인 테러를 제거하는 일종의 ‘청소’가 그 핵심작업이다. <007 카지노 로얄>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잘 드러나듯 결국 본드는 아직도 본드다. 그는 유전무죄, 빈익빈부익부, 약육강식 등의 (신)자유주의의 세계질서를 지키는 냉정하며 잔인한 ‘인간’이다. 007이 정말 달라지려면 영화에서 나온 ‘나쁜 놈’이 ‘착한 놈’으로 대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다음 007영화에서는 본드가 환경운동가들을 쫓거나 인권운동조직을 파괴시키려는 장면만이 본드의 진정한 변화를 의미한다. 007 시리즈 배경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서슴없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본드는 세계(체제)를 구하는 것이지, 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인간)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비유적으로는 한국의 현 상황과 비슷한 대목이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집권하며 과거의 진상규명을 함으로써 독재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 즉 사회가 ‘잘살게 해준’ 독재자들의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내년 대선 후보자인 ‘박명이’가 까만 안경을 쓰는 것은 우리가 웃지 못할 성공을 그에게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해야 사람들이 그의 숨은 의제를 알아차릴 건가? 리앙 느 바 쁠뤼!(Rien Ne Va Plus; 더이상 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