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까지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는 집에서 송년회를 했다. 열명이 채 되지 않는 회사 식구들을 모두 초대해서 자신이 만든 요리를 대접했다. 그런데 올해는 불가능하다. 아이필름 대표로 자리를 옮겨서다. 챙겨야 할 이들만 서른명이 넘는다. 바깥에서 회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직원만 늘어난 게 아니다. 라인업도 대폭 늘었다. 누군가는 2007년의 아이필름을 두고 제2의 싸이더스FNH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마술피리에서 개발하는 작품을 제한다고 해도 굴러가는 작품만 10여개다. 얼마 전엔 시네마서비스로부터 5편의 투자·배급 약속까지 받아냈다.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굳이 크리스마스에 인터뷰하자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여담 하나. 사진기자의 남편이 물었단다. “오늘 같은 날 누구 인터뷰해?” “영화사 대표.” “그 사람은 가정이 없어?” “없어.” 내년 이맘때도 그는 외로움을 태우는 대신 시나리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지 않을까.
-성탄 전야엔 뭐 했나. =종일 잠만 잤다. 그 전날까지 쭉 늦게 들어갔거든.
-왜 인터뷰한다고 생각하나. =그걸 나에게 물어보는 건 또 뭐야. 너무 심하지 않나. 인터뷰하기 싫음 말든가.
-올해 제작편수가 급증했다. 관객 수는 많이 늘지 않았다. 반면 수익률은 더욱 악화됐다. 2007년엔 투자가 위축되고 제작편수 또한 줄어들 것이라 한다. 충무로에 괴담이 돌지만 아이필름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울 것 같다. =올해 아이필름 영화가 없었다. 망한 게 없으니까 여유로운 거다. 얼마 전에 5편 묶어서 시네마서비스랑 투자·배급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새 출발하는 것 같은 느낌은 있다. 물론 남들은 편수 줄이려는 마당에 우리는 늘리려고 하니 부담이 없진 않다. 올해 상황이 내년 우리 모습이면 안 되잖나.
-패키지 투자·배급 건과 관련해서 시네마서비스쪽과는 언제부터 이야기를 나눴나. =부산영화제 때다. 부산영화제를 두고 영화의 메카라고들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웃음) 2007년에는 5편 정도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배급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더라. CJ나 쇼박스는 물량이 다 찼고, 롯데는 소극적이고, 중견 투자·배급사는 거의 몰락하고. 그러니 어떻게 하나. 만들어도 풀지 못하면 안 되는데. 부산에 오래 머물면서 제작자들을 만났다. 공동 배급사를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그 와중에 <천년학> 파티에서 강우석 감독을 만난 거다. 처음에 일 시작할 때 같이 했던 분이고 해서 상황을 설명한 뒤에 서울 가서 연락 드리겠다고 했더니 바로 뒤에 전화왔더라. 만나자고.
-제안부터 계약까지 굉장히 빨랐다. 1∼2편 투자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과정에서 시네마서비스와 의견 차이 같은 건 없었나. =너무 순탄했다.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한 얼마 뒤에 강 감독님이 보자고 했다. 내일 캐나다 간다면서. 만났더니 하자고 했다. 조건은요, 했더니 나보고 정리하라고 하더라. 캐나다 갔다 와서 다시 보자면서. 캐나다에서 왔다고 해서 갔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도장 찍었다. 조건 수정이나 그런 건 없었다. 그게 원래 그분 스타일이잖나. 얼마 뒤에 회사 식구들끼리 모여서 술자리 갖고 잘하자, 그게 전부다.
-계약 조건이 뭔가. =그건 말해줄 수 없고. 위반이니까. 시네마서비스가 2007년에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 5편의 메인투자와 배급을 맡는다.
-처음부터 패키지로 묶어서 제안했나. =그건 아니다. 강 감독님이 원했다. 5편이 어떤 작품이 될지는 모른다. 특정 작품을 정해놓고 가는 건 아니다.
-후반작업 중인 <바람피기 좋은 날>도 시네마서비스가 배급한다고 들었다. =맞다. P&A 비용 부담하고 부분투자한다. 패키지 계약 체결하고 나서 보여드렸는데 좋다, 개봉하자고 하더라. 곧바로 2월8일 개봉한다는 소식까지 날아왔다. 정신없는 거지. (웃음)
-공동배급에 대한 협의 이전에 독자 배급에 대한 고려도 했을 텐데. =정훈탁 공동대표에게서 처음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배급은 하지 말자고 했다. 아이필름은 아무런 힘이 없지 않나. 배급하는 쪽에서도 우리에게 작품 달라고 할 만큼 충분한 물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배급하겠다고 해봤자 견제만 받을 뿐이라고, 지금 필요한 것은 콘텐츠 생산이라고 말했다. 그걸 정 대표가 흔쾌히 받아준 것이고.
-아이필름 대표직을 수행한 지 6개월이 넘었다. =4월 말쯤 들어왔으니까 그 정도 됐겠다. 스크린쿼터 초기 싸움 마무리짓고 들어왔으니까. 마술피리 월급날이 매월 25일이었는데, 아마 그 직전에 들어왔을 거다. (웃음)
-처음부터 편수를 늘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던 건가. 정 대표로부터. =아니다. IHQ쪽 담당자들과 만나면서 편수를 늘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몇편 정도냐고 물었는데 허걱 했다. 처음엔 이쪽 판을 잘 모르는군, 그랬지.
-몇편이었나. =허걱, 하는 편수였다. 그 정도로만 하자.
-현재 개발 중인 작품이 모두 몇편인가. =시나리오 계약 끝내고 쓰는 작품까지 하면 15편 정도 된다. 내년에 한 6∼7편 가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촬영 들어가는 영화까지 포함해서. 물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신 못하겠다. 투자, 캐스팅 문제가 있으니까.
-아이필름 브랜드를 달고 선보일 영화들은 어떤 작품들인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작품은 <기다리다 미쳐>라는 로맨틱코미디다. 언제 기다리다 미치겠나. 남자친구 군대 보내놓고서 미쳐가는 고무신 클럽 이야기다. 류승진이라는 영상원 나온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캐스팅도 거의 다 되어가고 있고. 2월 말쯤 들어갈 것 같다. 다른 작품들은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한 <퀴즈>, 강남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가족코미디 <로스웰의 냉장고>, <싱글즈>를 연상할 수 있는 로맨틱멜로 <크래커>,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블루 혹은 블루>, 호러물인 <봉인된 마을> 등이 있다. 최인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할 <몽유도원도>도 준비 중이다.
-<비거>(飛車)라는 영화도 있다던데. 그건 뭔가. =하늘을 나는 차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평구라는 인물이 만들었다고 알려지는데, <신기전>이 준비 중이어서 계속 가야 하는지 여부는 좀 두고 봐야겠다. 조선시대 참봉 벼슬까지 지낸 뒤 결국 귀양을 가기까지 했다는 코끼리 이야기도 다른 영화사에서 준비 중이라고 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마술피리 이름을 걸고 만드는 영화도 있는데. =김대승 감독의 50대 멜로 <연인>(가제)이 있고, <미확인 비행 소녀>라고 여고생들의 성장드라마가 있다. 1926년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분위기로 만들려는 <연애의 시대>도 계속 개발 중이다. 마술피리에서 만드는 3편의 영화들은 CJ와 퍼스트 룩 옵션 계약을 맺은 상태다.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아이필름이냐, 마술피리냐를 나누는 기준은 뭔가. =아이필름에서 개발하던 건 아이필름에서 하는 거고. 마술피리도 그렇고. 사실 좀 헷갈린다. 앞으로 들어오는 영화들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두 회사를 합하진 않나. =언젠가는 그런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일단 아니다. 좀더 두고 볼 생각이다.
-요즘엔 영화 만들기는 쉬워졌지만 좋은 영화 만들기는 더 어려워졌다.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오기민이라는 프로듀서가 브랜드를 높일 수 있었던 건 후자에의 의지 때문 아니었나. 지금 자리는 과거보다 상업적인 고려들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인데,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도 된다. =성향이 어디 가겠나. 사실 자신이 없었다면 마술피리만 했을 거다. 상업적인 영화들에 대한 고민도 끌어안아야 한다고 봐서 아이필름에 왔고, 아직까진 작품과 흥행 둘 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이 재밌고, 편하다. 전엔 우리가 꼭 안 해도 되잖아 하면서 물리쳤던 영화들도 다시 들여다보게 되고 하니까. 아, 말 안 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전에 신혜은 프로듀서가 스포츠드라마 한편 하자고 할 때는 싫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가서 그랬다. 그거 재밌는 거 같은데 하자고. <크래커>도 그런 경우다.
-슈퍼16mm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저예산영화 제작 의지도 이전에 밝힌 적 있는데. =아이필름으로 오면서 적어도 1년에 1∼2편은 해야지 했는데. 솔직히 투자, 배급 등의 환경이나 조건만 떼놓고 보면 자신없다. 만들어야 하고, 또 저예산 펀드가 만들어진다고 하니까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고민들이 남는 거지.
-여러 편을 관리하려면 힘들겠다. =마술피리엔 신혜은이라는 아주 오랫동안 알아왔고, 시나리오를 봐도 똑같이 느끼는 프로듀서가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 있기도 하고. 물론 한계가 있다. 편수가 늘어나면서 몇개 작품은 회의 때 빠지고 시나리오만 읽는다. 2편 정도는 거의 내가 안 들어간다. 껴봤자 작품 개발에 도움이 안 되니까. 반면에 박헌수 감독이 준비하는 <장미의 전쟁>의 무협 버전 같은 영화는 전부터 관심을 둔 아이템이다보니 적극적으로 붙는 것이고.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두편이 가장 상업적인 아이템인가보다. =뭔 이야기야. 지난번에도 돈 안 되는 영화만 한다고 타박하더니만.
-마술피리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 회사였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시나리오도…. =마술피리가 만든 영화들보다 더한 시나리오들만 들어왔지. (웃음)
-영화인들이 최근 몇년 동안 다들 관객의 트렌드를 따라잡겠다고 하는데. 전보다 많은 시나리오를 접하다보면 그런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트렌드가 아니라 완성도다. <괴물>이나 <왕의 남자>가 트렌드와 무슨 상관있나.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요즘 시나리오들 완성도에 문제가 있다. 소재와 설정에 너무 주력한다. 반면 캐릭터, 사건, 디테일, 구성은 엉망이다.
-제작편수를 점점 늘려갈 텐데. 싸이더스FNH를 모델로 삼고 있나. =이쪽에 오면서 그 생각을 안 할 수 있겠나. 싸이더스FNH를 보고 배우는 게 많다. 지금은 다소 하강기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올라서겠지. 어쨌든 몸집을 불리는 데는 너무 연연해하지 않을 생각이다. 조직 내 인력이나 시스템도 다듬을 게 많고.
-체질 개선을 위해선 새로운 수혈이 우선이다. 그런데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이한 이력들을 갖고 있다. 전직 극장 관계자, 영화제 프로그래머, 게다가 기자까지 있다. 영화 현장에서 직접 뼈가 굵은 인력들 대신에 말이다. =요즘 영화 현장에는 긴장이 없다. 투자사들도 제작사의 네임밸류에 혹해서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제작사 내부에 검증 시스템을 둬야 한다고 보는데, 최근 5∼6년 동안 긴장없는 현장에서 일했던 인력들보다 외곽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회사에 긴장과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이 결정됐으니 내 맘대로 가자고 해선 산업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프로듀서 일을 맡기려면 현장 경험이 필수 아닌가. =프로듀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촬영현장에서 모니터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 작품 전체를 총괄하는 프로듀서는 프로젝트 기획과 개발쪽 일을 좀더 맡고, 대신 라인 프로듀서를 강화하면 된다. 지금 문제는 제2의 차승재, 제2의 심재명 같은 후배들이 없다는 거다. 나도 그렇지만 지금 제작자 대표 격인 사람들은 다들 영화계에 발디디던 시절에 무엇엔가 대항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제작시스템은 물론이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까지 기존의 것들을 거부하고 새것을 만들려고 했다. 근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누군가 성공하면 카피하고 뒤따르기 바쁘니까. 길을 만들어서 가려는 후배들이 없다는 건 아쉽다. 쉬운 길로 유혹하는 손짓들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제작사들과 공동 배급사를 만들려는 계획이 유효한가.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률을 개선하는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배급사가 왜 커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배급 피(fee)는 조금만 가져가는 형태로 공동 브랜드를 만들면 된다. 다른 분야 중소기업들은 공동 유통망을 만드려고 하는데 왜 영화쪽은 그렇게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 브랜드 만드려고 하다가 중견 투자·배급사들 다 망가졌잖나. 코스닥에 이름 올리려고 너무 욕심 부린 거지. 각개약진할 시기는 지났다.
-2007년에 한국영화 위기가 가속화한다고 했는데. =노조문제도 그렇고, 시장환경이 디지털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기도 하고. 문제는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이런 사안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느냐다. 뭐가 만들어지겠지, 그냥 따라가면 되겠지 하면 곤란하다. 지금처럼 하다간 7월1일부터 협약이 실행된 뒤에 대혼란이 올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연착륙하려면 지금부터 다져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다들 손놓고 있는 분위기다. 예산 정산은 물론이고 현장의 모든 스케줄 관리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망은 어떻게 하고 포맷은 어떻게 하고 직접 나서서 의견 개진하고 조절하고 그러는데. 우린 디지털 환경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을 찾는 데 게으르다. 그런 고민은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케이블, IPTV, VOD 등이 주요 부가판권 시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IPTV 포함해서 VOD 서비스 등이 극장 중심의 기형적 수익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본다. 극장이 60% 정도로 낮아지고, 그쪽이 40%까지 올라올 수 있다. HDTV가 곧 혼수품 목록에 오른다고 하지 않나. 이통사들이 셋톱박스를 무상으로 보급한다고 하지 않나. 좋은 화질, 좋은 음향에 시청까지 편리해진다면 누가 연체료 물고 비디오나 DVD 빌려보겠느냐고.
-전에 차승재 대표가 <씨네21> 강연 때 한 말이 생각난다. 제작자들이 부가판권 시장에 대한 관심을 일찍 기울이지 못한 것이 패착이라고 했었다. =2005년 제협에서 VOD 판권 관련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모 투자사쪽에서 “그게 돈이 돼요?”라고 물었다더라. 그러면서 무슨 투자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투자자들이나 제작자들은 지금 극장과 일본시장에만 관심있는데 나중에 VOD 시장이 커진 다음엔 자기 이해를 관철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미 딜은 모두 끝났을 테니까.
-맨 먼저 개봉하는 장문일 감독의 <바람피기 좋은 날>이 잘돼야 분위기가 불붙을 텐데. =아주 재밌게 나왔다, 는 소문은 돌고 있다. (웃음) 아직 편집본을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 못하겠다. 그래도 김혜수라는 배우는 정말 놀랍더라. 얼마 전에 포스터 촬영장에 갔었는데 카메라 앞에서 김혜수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거 보면서 이거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 노출 화보 같은 거 말고. (웃음) 좋은 배우의 좋은 시절을 찍어둬야 하는데, 정말 찍어둬야 하는데 그랬다.
-어쨌든 2007년 한국 영화산업 파워50 순위가 꽤 많이 오르지 않을까. =X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