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폭탄을 놓았다가 붙잡힌 람지 유세프를 헬기에 태워 압송하던 수사관은 유세프의 눈가리개를 풀어주고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무역센터 건물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건물이 보이나? 자네가 무너뜨리고자 했던 바로 그 빌딩이야. 꿈쩍도 않고 서 있지?” 유세프는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한다. “돈이 없었어. 내가 폭약을 충분히 살 수만 있었다면 저게 지금 남아 있겠나?” 그로부터 8년 뒤인 2001년 9월11일 화요일 아침, 위풍당당하던 110층 무역센터 건물 두동은 잿더미가 되어 내려앉는다. 유세프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제2, 제3의 유세프들이 되돌아온 것이다.
9·11사태 이후의 미국은 그 이전의 미국이 아닐 것이라고 미국 신문들은 입모아 말한다. 이번에 미국이 절감하게 된 것의 하나는 세계 분쟁지역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고 여겨졌던 본토 미국이 사실은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깨침과 함께 ‘미국의 요새화(要塞化)’론이 제기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을 비롯한 대도시들을 요새화하고 공항, 빌딩, 다리, 쇼핑몰, 스타디움 할 것 없이 요소요소 검문검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러 용의자의 얼굴을 잡아낼 수 있는 바이오메트릭 감시카메라를 인구 집중지역에 수백대씩 설치하자는 안도 나오고, 공항 안전검사요원들의 임금을 대폭 올려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실제로 미국 공항 검사요원들의 임금은 유럽 대비 1/3 수준인 시간당 6달러이고 이 고용비용도 정부 아닌 항공사 부담이다. 정부가 노랑돈 몇푼 아끼다가 집구석 무너지는 꼴 보게 되었다고 비판자들은 힐난한다. 아닌게아니라 이번 사태를 보면 미국은 항공안전 10등국이다).
그러나 미국의 요새화란 가능하지 않다. 워낙 큰 충격과 외상(外傷)의 뒤끝이라 지금 당장은 안전을 위해 시민 자유의 제한과 희생까지도 감내해야 한다는 논의들이 일고 있지만, 미국 요새화는 우선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 첫째, 요새화는 테러리즘을 막아내지 못한다. 죽기를 작정하고 달려드는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를 원천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물리적 방법은 없다. 둘째, 감시와 검문검색은 시민 자유와 양립하지 않는다. 느슨함은 한 사회가 시민에게 보장하는 자유의 정도와 비례한다. 그것은 자유사회의 결함이 아니라 장점이고 힘의 원천이며 오히려 사회적 안전의 기초이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한다면, 그 문제는 자유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자 대가이다. 길바닥에 줄줄이 감시요원을 배치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것으로 안전도를 따진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독재국가나 병영(兵營)국가일 것이다. 미국이 자기 주장대로 ‘자유를 토대로 한’ 나라라면 그 토대를 허물어 안전을 기한다는 역설은 그 자체로 파괴적인 것이다.
이번 테러리즘이 미국사회에 안긴 대재난은 일상의 느닷없는 붕괴 가능성이라는 유령의 출분(出奔)이다. 어느 나라이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비상(非常)이 아니라 일상이다. 그런데 언제 어느 구석에서 미국인의 일상(日常)이 찢어질지, 한끼의 버거킹, 한잔의 코카콜라에서 독극물을 의심해봐야 하고 내 직장 건물이 언제 주저앉을지, ‘자유의 여신상’이 언제 날아가고 타임스 스퀘어에는 또 언제 폭발물이 날아들지 매일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이 일상의 붕괴이다. 이것은 어떤 초강대국도 미사일로 대처할 수 없는 비상사태이다. 미국이 이 비상을 해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대미 테러리즘의 기원과 성격을 파악하고 그 기원을 해소하는 일이다. 테러리즘은 미국과 서방에 대한 이슬람권의 깊은 증오와 좌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증오는 무엇에 연유하고 그것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원은 무엇인가?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전쟁은 테러리스트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자체의 과거와 현재를 향한 성찰의 전쟁이어야 한다. 이 점을 망각할 때, 미국은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람지 유세프들을 계속 만나야 할지 모른다.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