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자고 있는데 ‘펑!’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 드디어 폭발한 것인가. 의문을 갖던 차에 결국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젠가부터 화가 사라진 것이다. 내 영감의 동기는 분노였다. 분노의 찌꺼기 놀음을 하던 자에게 분노가 사라졌다는 건 의욕을 잃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분노도 의욕도 자극도 없는 삶.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극없는 삶이란 얼마나 기이한가. 이젠 영화나 책을 봐도 전혀 자극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활자 중독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 무심코 광고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사람은 한번쯤 활자 중독을 의심해봐야 한단 이야기였다.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무의미한 시간을 싫어한다. 심심하지 않으려고 버스 앞 좌석에 붙은 검정고시학원이니, 신들린 운세 서비스니 하는 광고들을 훑기 일쑤다. 가만있는 뇌라는 것은 죽은 뇌나 다름없다. 그렇게 쓸데없는 정보들을 꾸역꾸역 넣었던 탓일까. 뇌도 감정이란 게 있나보다. 포화상태에 다다른 뇌는 태업을 선언한 노동자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노인의 뇌가 이식된 기분이다.
할아버지와 살 땐 그분들의 일과를 이해하지 못했다. 늘 멍한 상태처럼 보일 뿐 아니라, 삶이 70살 이후로 완전히 멈춰버린 분 같았다. 98살에 돌아가셨으니 근 30년간 살아 있는 좀비처럼 살다 가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쥐포를 드시고 5시간 이상 낮잠을 주무시고 진지를 드시고 다시 주무시고. 화 같은 건 한번도 내지 않으셨다. 동물의 겨울잠 같은 인생이 과연 의미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채로 살아가신 게 아닐까. 할아버지가 입관하시던 날, 비로소 할아버지는 제2의 허파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신 게 아닐까.
얼마 전 친구의 병실을 찾아갔었다. 뇌에 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느라 좌뇌가 살짝 틀어진 친구의 사고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밥먹었냐는 말에 대답하는 데 5초 이상이 걸렸고, A라는 사람이 병문안 왔냐는 말에, A는 결혼했다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난 친구를 보면서 뇌의 경이로움, 현대 의학의 발달, 건강은 미리미리 챙겨야 한다는 생각 이전에 약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상당히 발랄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만나면 늘 일을 그만두고 싶다던 친구였다. 그런데 병실에 있던 그녀는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처럼 멍한 표정으로 가장 단순한 의사소통만을 소화해냈다. 2달이 지나 친구는 회복했고 평소처럼 직장에 잘 다닌다. 아직 일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어도, 예전의 매너리즘 같은 건 엿보이지 않는다. 자극없는 삶에서 구조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머리 뚜껑을 완전히 열어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삶이 비극적으로 여겨진다.
자극을 끝없이 필요로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극이 없어도 평화로운 삶을 살 것인가. 만일 전자를 택한다면 인생의 리듬이 격렬한 만큼 슬럼프를 꿋꿋이 이겨낼 용기가 있어야 하고, 후자를 택한다면 행복하되 심심한 인생이 될 것 같다. 난 고민 끝에 전자를 선택했다. 지금까지의 삶의 균형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을 만큼 큰 자극이 필요했다. 인생의 소비자로서는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어쩌면 잠결에 들은 ‘펑!’ 소리는 자극의 극치를 넘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오토바이든, 드럼이든, 영화든 닥치는 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떠는 친구 대신 마술 동호회의 친구를 만나 마술을 배웠다. 우려한 대로 내 일과는 자극을 위한 삶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삶을 위한 자극이 아니라 자극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지만 나사 풀린 상태에서는 심각한 변화조차 큰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만다. 결정에 관여하는 뇌세포가 몽땅 죽어버린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대로 행복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극에 반응하는 뇌가 아니라 자극없는 삶을 받아들이는 가슴이다. 2006년이 간다. 가슴을 더 활짝 열어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