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꿈 스무살, 나의 꿈은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운동(Excersise)을 하고, 일도 끝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운동(Movement)을 하는 것이 좋겠군, 그것이 건강한 시민이야. 도대체 무언가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다행히 비겁해서 무언가에 목숨 걸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주말에 클럽에 가면서 뜬금없이 주사파 생각을 한다. 그리고 슬며시 안도한다. 어쩌면 그들은 순결한 사람이야,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잡힌 쓸쓸한 사람들이야, 생각한다. 그렇게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이제 와서 당신의 신념은 틀렸으니,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하라고 말하는 것은 좀 가혹하지 않아, 혼자서 되뇐다. 어쨌든 그들은 선의에서 출발했잖아? 물론 세상이 바뀌는데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고,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오홋, 냉담한!
##서른다섯의 토요일 서른다섯, 혼자서 밥먹고 혼자서 운동하고 혼자서 클럽간다. 얼마 전 선배와 농담을 하다가 “회사형 히키 고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하고서 웃었다. 밥벌이 때문에 회사에 나오긴 하지만 회사를 집처럼 은둔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말씀. 나도 커피광고의 강혜정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졌다”고 웃으며 말하고 싶으나 혼자 있을 수밖에 없도록 세상이 변했다. 이태원 출입 어언 10년, 더이상 친구들은 주말 밤에 이태원 클럽에 가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종로의 가라오케 바에서 죽치거나 조신하게 집에서 주무신다. 스스로를 20대라고 생각하는 30대가 세계에서 가장 많다는 한국에서, 역시나 한국인다운 서른다섯의 신윤동욱 아저씨는 오늘도 주말 밤 이태원행 지하철 막차를 타고 클럽으로 향하신다. 이태원역에 내리면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선수들이 줄줄이 출근하는 풍경도 보인다. 한동안 주말마다 빠짐없이 출근도장을 찍었더니 선수들이 클럽에 입장하는 순서까지 외울 지경이다. 일찍이 언니들은 말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영원한 ‘포스’다. 같은 클럽, 같은 사람, 같은 음악, 그래도 설렁설렁 춤을 추다가 두리번 곁눈질도 하다가 자리를 옮기면서 물도 보다가 어쨌든 아저씨는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아저씨의 모범생 근성이다.
오로지 외모로 승부하는 매력의 전시장에서, 승자도 패자도 아닌 어정쩡한 포즈로, 아저씨는 과연 이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괜찮은 것일까, 생각에 잠긴다. 서너해 전, 아저씨는 방콕에서 비로소 개인이 됐다고 느꼈다. 언제나 마음뿐인 강박이었지만, 어쨌든 이제야 공동체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것은 내게 확실히 하나의 매듭이었다. 몸을 만들고, 옷을 차려입는 개인들의 각개전투가 즐겁지만 피곤해서 아저씨는 이따금 공동체의 따뜻한 온기를 그리워한다. 그런데 묻는다. 나에게 그런 공동체가 있기나 했던 것일까? 상상의 공동체, 오호 통재라!
##서른다섯의 일요일 오늘도 달린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아저씨는 저녁길을 달린다. 달리면서 생각한다. 도대체 어디에 몸을 두어야, 이토록 지겨운 우울은 줄어들 것인가. 언젠가는 떠나온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의 세계에 몰입은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내일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무쓸모 질문을 하고 또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철들지 못하는 것이며 나의 사춘기는 이토록 오래된 것일까. 이것은 시대의 징후일까.
그래도 우울한 일상은 다른 우환이 없다는 증거라고,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고독이나 우울 따위야 이제는 이름도 아득한 시인의 표현처럼 세상에 세들어 사는 집세 같은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위로는 짧고 갈등은 기나긴 법. 내일이면 아저씨는 애인은커녕 이제는 친구조차 없다고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 출근길에 차창으로 스치는 수백일째 파업 중인 코오롱 노조의 천막을 보면서 갈등에 빠지겠지. 그렇게 서른다섯, 아저씨는 여전히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꿈을 선선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지독한 그리움, 오호 쾌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