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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 보류되는 박찬욱 영화 속 유아들의 세계

착각과 착란의 뮤지컬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착각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지금 내가 뮤지컬영화에 초대받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의 작은 테마를 갖고 있는 조역들은 단지 노래로 옮겨 부르지 않을 뿐 자신의 차례가 오면 이야기로서 화음을 맞춰 주인공에 조력한다. 마침내 영군의 목 안으로 밥이 넘어 들어가고 그 동작을 모두가 따라하고 주시하는 그 순간은 이 유쾌한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며, 집단 군무에 가깝다. 그들은 그때 함께 행복에 젖는다. 행복에 가장 가까운 장르인 뮤지컬은 이럴 때마다 꼭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이 영화를 뮤지컬처럼 보았다는 것은 온전히 나의 착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의 이름 짓기는 누가 봐도 남녀의 이름이 뒤바뀐 뉘앙스를 주려는 의도다. 영군의 할머니는 자신이 어미쥐라고 생각하여 정신병원에 실려 간다. 영군의 어머니는 순대 찍어먹는 소금과 할머니의 유해를 혹은 사물들의 명칭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한다. 일순은 자신이 남의 존재성을 훔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일순에게 도둑질을 당한 환자들, 가령 공손함이 지나쳐 병이 된 환자 역의 오달수는 그 공손함이라는 무형의 성질이 훔쳐질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순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사이보그는 사이코와 헷갈리고, 그렇게 두개로 불려도 괜찮은 영군은 밤의 자리에 밥이라는 글자를 넣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른다. 모두가 기꺼이 착각하며, 그 착각으로 기쁨을 함께 누릴 자격을 얻는다. 나는 이 영화가 ‘착각과 착란에 대한 예찬으로 이루어진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

동화라고 말해도 사정은 같아진다. 동화가 순진하든 그로테스크하든 교훈을 남기는 미덕을 위한 것이라면, 여기서 남기는 교훈은 ‘착각함을 따르고 믿는 것’이다. 할머니가 남겼다고 영군이 생각하는 말, “존재의 목적은…” 다음에 무슨 명확한 뜻이 있는지에 관해 박찬욱은 대답을 준비하지 않는다. “십억 볼트… 핵폭발….” 뭐라고 뭐라고 하는 찢어진 신문읽기 같은 불가능한 해석 그 자체를 미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는 박찬욱이 예고한 바와 달리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박찬욱답지 않다고 놀랄 이유가 없다. 박찬욱은 착각과 착란에 관한 숭배자다. 고래와 진달래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 늘 그의 세계에서 허용 가능한 일이다. 비단 여기가 정신병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원이 된 것이다.

착각과 착란이 가리키는 박찬욱 영화의 원초적 욕망은 ‘양가적인 것들의 공존과 판단의 보류’다. 그것을 남과 북으로, 선과 악으로, 조리와 부조리로, 죄와 용서로, 유치함과 숭고함으로, 정상과 비정상으로 혹은 이런 대칭이 아닌 비대칭의 그 무엇으로 짝을 지어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그 누군가(인물과 관객과 때때로 본인)의 판단력이 그 사이에서 멈추거나 바닥날 때까지 끌고 간다는 것이다. 복수 3부작 그들의 최후에 관해 누구도 쉽게 분명한 판가름을 하기란 힘들다. 박찬욱은 완벽하게 다른 차원에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붙여놓으면 훌륭한 아이러니를 창출할 것 같다고 느끼는 요소나 상황을 서로 연결한 뒤에, 그 다음부터는 그것들의 복마전을 펼치다가 끝내는 어떤 명확한 판단도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의 ‘탈’지대로 데려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머무르게 하고 싶어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물가와 <올드보이>의 설원과 <친절한 금자씨>의 눈 오는 길목은 그렇게 판단이 무너지고, 인물들과 우리의 착란이 함께 이는 곳이다. 다만, 예민한 주제어들을 건드려놓은 복수 3부작은 그것에의 마지막 진술을 요구받아야만 했는데, 그것을 ‘제로’로 돌린 뒤 상상적 시스템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진의를 질문 받거나 무의미한 상상력이라는 비판을 얻는다. 그것이 복수 3부작이 남긴 논쟁의 불씨였다.

지금 이 영화에서는 그런 면모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럴 만큼 아슬아슬한 주제어와 경로가 없고, 영화적으로도 사활을 걸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판단은 처음부터 무용하다. 미리 말한 것처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의미는 박찬욱 영화의 원초적 욕망 혹은 그의 영화적 유년성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동안 영화 속 어른들의 상태 안에 도사리고 있던 그것이 정신병원 아이들의 모습으로 현현되어 지금 뛰놀고 있는 중이다. 이번 방식을 지지하긴 힘들어도, 그게 박찬욱의 것인 건 분명하다.

그의 영화를 흥미롭게 보면서도 늘 아쉬워하는 점이 지금 이 자리에서도 떠오른다. 그의 영화는 스스로 상식을 완전히 뭉갰다고 생각하거나, 표현들이 잔인해 혹은 유치해 관객이 못 견딜 거라고 걱정하는 장면일 때조차 내가 보기에는 항상 고풍스럽거나 신사적이어서, 나로서는 진짜 불가해함에 이르는 진입로를 매번 차단당한다는 느낌이다. 나는 박찬욱의 영화가 정말 더러운 저열함의 본체를 한번 끌어안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럴 때야말로 그가 그토록 바라는 모든 양가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우주가 빅뱅하게 되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난 뒤, 인터뷰를 하러 가서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이 말을 해버렸다. 그의 대답은 간략히 말해 그건 나와 맞지 않는다, 그럴 생각이 없다, 이다. 그렇다,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런데도, 나는 언젠가 박찬욱이 꼭 한번 그런 걸 함께 다루었으면 하고 여전히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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