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시장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흘러나온 지는 오래됐다. 이제 위기가 아니라 붕괴라고까지 말한다. 매년 시장 규모가 커져 이젠 3조원 가까운 매출실적을 올리고 있고, 해마다 100억원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출판사들이 10여개곳 이상이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곪을 대로 곪았다. 특히 상위 5개 출판사의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어서는 기형적인 시장구조 아래서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허덕이고 있다. 많게는 50%까지 깎아주는 불안정한 도서정가제와 대형 서점 및 대형 출판사들의 횡포와 전근대적인 유통구조 등으로 악순환만 계속되고 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시장이어서 뜻과 의지로 고군분투하는 전문 출판사의 약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우직한 행보가 궁금해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갈무리, 요괴물 전문 출판사 손안의책,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을 찾았다. 많이 팔리는 책보다 꼭 필요한 책을 전해주고 싶다는 이들의 마음을 살짝 들여다보자.
침묵을 깨고 삶의 밑바닥까지
사회과학서적 전문 출판사 갈무리
“책 만드는 일이 가장 쉬웠다.” 조정환 대표의 말은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유의 뻔한 거짓말과 다르다. 1980년대 말 박노해 시인과 함께 <노동해방문학>을 주도적으로 펴낸 그는 10년 넘게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서창현 교수와 함께 갈무리(www.galmuri.co.kr)를 준비하던 1992년에도 그의 집 앞에는 늘 “안기부원들이 상주했다”. “활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내 생각의 변화라든지 같이 연구하는 사람들의 성과를 알리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세계화의 물결이 한국사회를 덮치고, 다른 세상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떳떳하게 투항하던 그때. 족쇄를 차고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에게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는 절실함은 삶의 이유였다. “숨어 살며 할 수 있는 일이 출판이었다. 기부금 500만원으로 다른 출판사의 한 귀퉁이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다.” 1994년에 출판사 정식 등록을 했지만, 감시를 피하는 일은 만만찮았다. “원고청탁도 관악산이나 북한산에서 했다. 바위에 돗자리 깔아놓고 김밥 먹으면서. (웃음)”
1994년에 이원영이라는 가명을 써가면서까지 어렵사리 번역한 크리스 하먼의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은 대학가 등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3300부 정도 팔렸다. 사회과학서적 출판이 퇴조하는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잘된 거다.” 옛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해석해서 비판하는 국제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저서는 사회주의권의 도미노 붕괴 이후 각광을 받았다. 지금까지 80여권의 단행본과 20여권의 잡지들을 만들어온 갈무리는 1995년부터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자율) 운동을 대표하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책들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이름을 얻었다. “삶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치를 끌어오는” 네그리의 이론에 빠져든 그는 본인이 직접 지은 <아우또노미아>를 비롯해서 <혁명의 시간> <다중> 등을 펴냈다. “1990년대에는 많이 펴내지 못했다. 적게는 3권, 많으면 6, 7권 정도. 이젠 억압적 조건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지출할 필요가 없어서 그때보다 많이 출판한다. 돈 있으면 찍던 때와 달리 재정적 압박은 더 심하지만. (웃음)”
갈무리는 최근 들어 자율주의에 관한 책 이외의 사회과학서적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페미니즘, 포스트 식민주의, 생태 등에 관한 책들을 카이로스 총서라는 이름으로 펴내고 있다. 다른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점점 줄어가는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 또한 고립될 테니까.” 출판사 외에 웹저널 <자율평론>(www.jayul.net)과 다중네트워크센터(www.waam.net)를 운영하면서 온·오프라인과 연구공동체라는 삼각편대를 꾸리고 있는 갈무리 식구들은 책을 펴내는 일에만 자족하지 않는다. 조정환, 신은주, 오정민, 정현수 등 갈무리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FTA 반대집회 일정이 언제냐고 수시로 확인하곤 한다.
다시 권하고 싶다!
<시지프의 신화일기> 석제연 지음 | 2003년
“<시지프의 신화일기>라는 책은 저자인 석제연이라는 분이 제안을 해서 낸 책이다. 그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 소설 등을 주로 내왔는데 영역을 좀더 확장했다. 출판 당시 운동권 이미지를 벗기 위해 표지도 돈 많이 들여서 컬러로 멋지게 찍고 그랬는데. 지금 책고에 그대로 쌓여 있다. 선물용으로 증정하곤 한다. (웃음) 아우또노미아 총서나 카이로스 총서는 그래도 고정적으로 꾸준히 나가는 편이다. 사회과학서적은 멀리할수록 다시 읽기 어려운데 그런 독자들의 난점 해소를 돕기 위해 디알로고스 총서를 내고 있다. 조만간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이 나온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12번의 대담 내용을 담았다.”
환상의 이야기꾼들이 부활하는 곳
요괴물 전문 출판사 손안의책
요괴물 전문 출판사라고 불러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면, 손안의책(www.bookinhand.co.kr)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교고쿠도 시리즈’, ‘음양사 시리즈’, ‘샤바케 시리즈’ 등 일본 요괴물을 많이 내고 있기는 하지만 초반에 나온 책들 중에는 연애물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 서적 전문이라고 하자니, 손안의책에서 낸 첫 책은 한국 작가 책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손안의책은 지금 서른을 갓 넘긴 나이의 세 여자가 “좋아하는 책을 내보자”고 의기투합해 2001년 만든 출판사다.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한다는 방침 때문에, 재밌게 읽은 책이라면 굳이 책의 성격과 출판사의 색깔을 한 가지로 규정짓고자 하지 않았다. 국제부 김수진, 디자인부 장세연, 편집부 이주영. 세 사람은 각 부의 부장과 부원을 겸해 일하고 있다. 당연히 세 사람 사이에 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판사를 찾은 날, 김수진씨와 장세연씨는 2주일간 휴가를 겸한 출장을 떠난 상태라 이주영씨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 작가 리향의 <더 월릿>이라는 책을 시작으로 <키리하라가의 사람들> <리오우> 같은 책을 꾸준히 내온 손안의책이지만, 출판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음양사>부터였다. “마침 영화 <음양사>가 국내 개봉되었다. 그 덕에 홍보효과를 본 셈이다. 처음으로 초판을 다 소화했다.” 달짝지근한 연애담을 주로 내던 스노북스와 요괴물과 환상문학 종류를 내던 오프북스로 나누어 책을 내던 초반의 방침이 그즈음부터 바뀌었다. “<음양사>와 <우부메의 여름>이 반응이 좋아서 비슷한 책들을 계속 내고 있다.”
손안의책에서 낸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교고쿠도 시리즈 1권, <우부메의 여름>이다. 640쪽이나 되는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분권도 하지 않고 냈는데, 인터넷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져 성공을 거두었다. “김수진씨가 일본의 책 관련 잡지인 <활자구락부>에서 <우부메의 여름>에 대한 글을 읽은 게 시작이었다. 수진씨가 책을 읽고 재미있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반대했다. 초반에 교고쿠도의 장광설이 너무 길게 이어지는데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해서 사람들이 좋아할까 싶었다. 그런데 수진씨가, 그래도 좋아하는 책을 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해서 결국 내기로 했다.” 덕분에 이제 출판사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서 “이젠 월급도 좀 나온다”. 최근 일본 소설 붐이 일고 있지만 손안의책에는 큰 변화가 없다. “전반적으로 관심이 생긴 건 좋지만, 우리가 내는 책이 전반적 관심의 테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책인가 생각해보면 답은 잘 모르겠다. (웃음) 독자들이 좋아하겠지 하는 예측이 늘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재미없게 본 책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책을 내는 건 오만인 것 같다.” 손안의책에서는 곧 <음양사> 6권과 <샤바케> 2권이 나올 것이고, 내년 5월이면 교고쿠도 시리즈 중 가장 재밌다는 <텟소의 우리>가 출간될 예정이다. 아무래도, 손안의책은 요괴물 전문 출판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다시 권하고 싶다!
<리오우>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 2003년
“<리오우>는 경찰소설로 유명한 다카무라 가오루가 쓴 하드보일드 청춘소설이다. 다카무라 가오루의 대표작도 아니고 가장 인기있는 작품도 아니지만, 그냥 잊혀지기엔 아까운 장대한 연애물이다. 큰 출판사에서 디자인이나 마케팅에 힘을 줬다면 더 많이 팔릴 책이었는데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좋아하는 분들은 많은데 왠지 잘 안 팔리는 <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도 꼭 권하고 싶다.”
뜨거운 눈빛으로 시대를 기록하다
다큐멘터리 사진집 전문 출판사 눈빛
눈빛(www.noonbit.co.kr)의 존재를 새삼 깨달은 건 대학로에 있는 이음이라는 예술전문서점에서였다. 우연히 사진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어려움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됐는데, 결론은 “힘들더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눈빛 같은 출판사가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고 또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89년 2월, 크리스 마커의 <북녘사람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00여권의 사진 서적을 펴낸 눈빛은 사진작가들, 특히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 보배 같은 존재다. “책을 줄기차게 내다 보니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부자인 줄 안다. (웃음)”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이규상 대표가 사진에 뒤늦게 눈뜬 건 1980년대 열화당에서 포토포쉐(photo poche)라는 문고집을 출판하면서부터. “사진이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매력적인 재질의 매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얼마 뒤 미술평론가 정진국씨의 추천으로 이영준, 여균동 등과 함께 눈빛을 차렸다. “여균동 감독하고 나하고 주로 둘이 일했다.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둘이서 사사건건 일로 괴롭히니까 못 견디고 나갈 정도였다.”
사교댄스 교습소가 있는 16평 건물에서 사회사진연구소와 함께 사무실을 나눠 쓰며 분투했던 그때. “민중의 삶을 기록하는 국내 다큐멘터리 사진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겠다”는 열정과 희열이 없었다면 김기찬부터 성남훈까지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사를 증거하는 이들의 작품을 묶어낼 수 있었을까. 그렇다 해도 20년 가까이 사진을 나눠온 그가 베스트셀러 만들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건 좀 의외다. 외려 트렌드를 좇는 베스트셀러를 독약으로까지 여긴다. “뭘 내야 돈이 될지는 다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한번 맛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 난 그나마 미녀 편집자들을 모시고 일하지 않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뜻있는 전문 출판인들이 적지 않다.” 고급형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함께 온갖 기술서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지만, 그는 한눈팔지 않고 고집스럽게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한 의미있는 출판작업을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다. “최민식 선생의 50년 작업을 정리하는 <휴먼>의 경우 몇 군데 출판사에 제의했었는데 다들 거절했다고 하더라.” 그런 사정을 듣고서 그저 안타까운 한숨만 더했을까. 얼마 전 전민조의 <서울>, 김한용의 <희망의 연대기> 등 두툼한 기록사진집을 연달아 내놓은 그는 조만간 “아직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노(老) 작가의 200여점 사진이 실린” <휴먼>의 마무리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 출판은 한 나라의 문화 역량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여기는 그는 사진전문서적들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가능하려면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이라도 최소한의 관심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저자를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배달도 나가고 교정도 보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다고 쓰지 말아달라. 즐거운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으니까.”
다시 권하고 싶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박도 엮음 | 2004년
“언론 등에서는 금기의 역사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소설가 박도 선생이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한국 현대사 관련 파일을 뒤적이다 발견한 수백장의 사진들을 모은 이 책은 1차적인 사료로서의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갖고 있다. 간혹 사학과나 정치학과 소장 교수들이 이 책을 문의할 때는 뿌듯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실감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