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연말이 되면 몸과 마음이 두루 바빠진다. 12월이라고 하여 10월보다 특별하지는 않을 텐데, “올해가 가기 전에…”라는 말은 자주 만나지 못했던 지인을 만나고 미루어두었던 숙제를 해치우고 가끔은 대청소도 하는 핑계가 되어주곤 한다. 그러나 함정이 있으니 만나면 술이다. 며칠 있으면 나이 한살이 더해지니 한숨이고 술 때문에 피부가 퍼석해져 다시 한숨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연극과 뮤지컬, 모처럼 들러보는 전시회, 노래방보단 콘서트. 이런 연말 스케줄이면 어떠할까. 12월과 1월에 만날 수 있는 공연과 전시회와 콘서트를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빈 술병을 줄지어 세우며 보내는 밤도 좋겠지만 티켓북에 반쪽짜리 티켓을 붙이며 보내는 저녁도 괜찮을 것이라 믿는다.
풋풋한 청춘, 애틋한 사랑, 곡절의 인생이 무대 위에
<그리스> 12월25일까지/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 02-556-8556
1972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그리스>는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젊음’을 대변하는 뮤지컬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타일과 취향은 변하더라도 그 에너지와 본질은 그리 많은 변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Summer Nights> <Look At Me, I’m Sandra Dee> <You’re The One That I Want>처럼 풋내나는 사랑과 고민의 노래를 듣다보면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청춘의 한 시절이 명랑하고도 애틋하게 다가오곤 한다. 가죽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티버드파 십대 소년들은 대니가 한여름 해변에서 만났던 예쁜 소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무렵 교정 다른 편에선 핑크레이디파 소녀들이 리더 프렌치가 데려온 얌전한 전학생 샌디의 첫사랑 추억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다시 만난 대니와 샌디는 오해와 이별을 겪으며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간다.
<늙은 부부 이야기> 2007년 1월14일까지/ 코엑스 아트홀/ 02-741-3934
단지 달력 한장을 남겨두었을 뿐인데 12월이 되면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그렇다면 인생이 달력 한장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노인들에게 삶은, 그리고 사랑은 어떤 빛깔로 다가오는 것일까. <늙은 부부 이야기>는 그런 노인들에게도 아직 찬란한 빛깔 한 가지는 남아 있다고 들려주는 연극이다.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온 노인 박동만은 화려한 옷을 즐겨입고 할머니들에게 은근히 수작걸기를 즐겨한다. 방세에 눈이 멀어 그를 세입자로 들인 이점순 할머니는 허세투성이의 박동만이 못마땅하지만, 차츰 홀로 버텨온 세월의 억센 흔적을 버리고 고운 여인의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삶이 저물어갈 무렵 만난 박동만과 이점순은 함께 손을 잡고 부부로 살기에 이른다. 이순재와 성병숙, 양택조와 사미자가 각각 부부로 출연한다.
<돈 주앙> 11월30일∼12월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02-792-2633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불후의 바람둥이가 된 돈 주앙 이야기를 뮤지컬로 각색했다. 역시 프랑스 뮤지컬인 <노트르담 드 파리>처럼 대사없이 41곡의 노래만으로 이어지는 <돈 주앙>은 라틴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노래와 화려한 플라멩코 군무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젊은 스페인 귀족 돈 주앙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수녀원에서 나온 정혼녀 엘비라도 외면한 채 끝없는 쾌락만을 좇는 바람둥이다. 존경받는 기사의 딸을 유혹한 돈 주앙은 결투 끝에 기사를 죽이고, 그의 저주를 받아 진정한 사랑이라는 재앙에 직면한다. 돈 주앙은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조각가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마리아의 약혼자인 군인 라파엘과 엘비라의 질투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기에 이른다.
<마리아 마리아> 12월8∼3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4-2421
제10회 한국뮤지컬 대상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고 뉴욕 뮤지컬 시어터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은 창작 뮤지컬. 성경이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소재를 재해석해 새로운 이야기로 빚어낸 솜씨가 돋보인다. 주인공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막달라 마리아. 로마 군인들에게 몸을 팔며 밑바닥을 구르던 창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적대 세력인 바리새인에게 유혹적인 제안을 받는다. 예수를 타락하게 한다면 로마로 보내주겠다는 것. 그러나 예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막달라 마리아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대면하며 갈등하고, 신자이자 여인으로서 예수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창작 뮤지컬이 빈곤하던 무렵 성공을 거둔 <마리아 마리아>는 대규모 인원이 아닌데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군무와 애절한 노래 <나의 남자> 등이 기억에 남는 작품. 강효성과 소냐, 허준호, 윤복희 등이 출연한다.
<마리화나> 12월31일까지/ 아리랑 소극장/ 02-3673-5580
아내 복이 없었던 문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빈을 모두 간음으로 잃었다. 그중 두 번째 빈이었던 봉씨는 남자도 아닌, 궁녀와 통정을 해 궁중을 뒤흔들었는데 <마리화나>는 그 사건을 현대적인 시선으로 각색한 연극이다. <이발사 박봉구> <성인용 황금박쥐> 등에서 유머와 함께 외로운 이들의 마음 깊은 곳을 보여주었던 극작가 고선웅은 “얼토당토않은 시대의 만행을 다루고 싶었다” 말로, 언뜻 자극적으로 보이는 이 연극의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세자 휘지는 내관 용보와의 관계에만 몰두할 뿐 젊은 세자빈 봉씨를 냉대한다.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내던 봉빈은 남몰래 구한 <카마수트라>에 빠져 나인 소쌍과 방중술을 연습하고, 소쌍은 또다시 같은 방을 쓰는 나인 단지와 더불어 연습한 결과를 즐긴다. 여기에 내관 부귀와 단지, 봉빈의 나인 석가이의 이야기가 얽혀든다.
<밑바닥에서> 2월19일까지/ 대학로 열린극장/ 02-765-8108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을 자유롭게 각색한 창작 뮤지컬. 러시아 민요처럼 애수어린 멜로디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밑바닥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하층계급의 삶을 담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여 5년형을 살고 나온 페페르는 누이 타냐의 술집에서 축하파티를 연다. 그사이 연인 바실리사는 백작과 결혼했고 여동생 안나의 병은 더욱 깊어졌지만, 페페르는 그저 그날 밤을 즐기고자 한다. 파티가 한창일 무렵, 타냐가 새로 종업원으로 고용한 나타샤가 술집에 도착한다. 페페르는 밝고 낙천적인 나타샤에게 이끌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희망을 품지만 바실리사의 집착은 그들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봄노래> <잘자라 안나> 등이 귓가에 맴도는 <밑바닥에서>는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린 배우와 꿋꿋하게 살아남은 타냐 등의 주변 인물도 연민의 시선으로 끌어안는다.
<보고 싶습니다> 12월31일까지/ 사다리아트센터 세모극장/ 02-744-7304
앞을 보지 못하는 지순은 정신마저 온전치 못해 구멍가게를 찾는 손님에게 무조건 박카스 두병을 건네곤 한다. 그 박카스 두병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보고 싶습니다>는 나쁜 것이라고는 보지 못했던 착한 여인과 그녀를 만나 착해지고 싶었던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되짚어가는 연극이다. 조직의 돈을 가로채 고향으로 돌아온 건달 독희는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망연해진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박카스를 사러 지순상회에 들르던 독희는 모르는 사이 조금씩 앞 못 보는 가게 처녀 지순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직의 추적은 고향에까지 이르고, 누이에게 개안수술을 해주려는 욕심에 건달패와 어울리던 지순의 동생 지성이 독희를 발견하고 만다. 2002년 조용히 공연을 시작해 매년 앙코르 공연을 거듭하며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양덕원 이야기> 12월15일∼2007년 1월7일/ 세우아트센터/ 02-747-1010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그 곁에 모인 가족이 보내는 몇달 속에, 흩어져 있던 삶의 조각들을 소중히 모아놓은 작품. 극단 차이무 대표 민복기가 쓰고 연출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딸이 한데 모인다. 세 시간만 있으면 운명한다던 아버지는 며칠을 버티고, 그 자리 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자식들은 어머니만 남겨둔 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석달 동안 아버지는 생사를 오가며 그때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을 이유를 주게 된다. 여기에 가끔 출몰하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도 엮어넣은 <양덕원 이야기>는 냉소와 풍자가 가득한 차이무의 작품 중에서도 유순한 편에 속하지만 쉽게 버릴 수 없는 사연을 전해주는 연극이다. <왕의 남자>의 정석용과 <정글쥬스>의 전혜진 등이 출연해 아기자기하고 보기 흐뭇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오픈런/ 예술극장 나무와 물/ 02-762-0010
가톨릭 재단의 무료병원장으로 부임한 베드로 신부는 기부금을 끌어오기 위해 602호 환자 최병호를 TV 다큐멘터리에 내보내고자 한다. 7년째 입원해 있는 최병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TV 출연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생방송 전날 밤 사라지고 만다. 그는 하반신 마비 환자였다. 베드로 신부는 최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숙자 환자와 치매에 걸린 이길례 환자 등을 탐문하고 602호에 배정된 자원봉사자 김정연도 수상하게 여긴다. 폭설이 쏟아지던 밤에 최병호는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간 것일까. 의사와 환자들은 문득 이 병원에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자원봉사자가 한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밀실추리 형식을 도입한 <오! 당신이 잠든 사이>는 탐문과정 사이사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따뜻하고 다정한 노래들을 들려준다.
<판타스틱스> 1월21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02-762-0010
<로미오와 줄리엣>의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뮤지컬. 그러나 해피엔드가 아니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이웃사촌 벨로미와 허클비는 자식들을 맺어주고 싶은 마음에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인 척한다. 사랑은 장애물이 있어야 불타오르게 마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대로 마트와 루이자는 아버지들의 눈을 피해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된다. 흐뭇해진 벨로미와 허클비는 집안의 반대보다 극적인 위기를 만들어보고자 하지만 그만 들통이 나고, 천진했던 사랑은 진짜 위기에 처하고 만다. <Try To Remember>로 유명한 <판타스틱스>는 현실적인 그림자가 섞여 있는데도 진실한 사랑에 손을 들어주는 뮤지컬이다. 어설프지만 직업의식 충만한 유랑극단 헨리와 모티머, 말없는 담벼락씨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