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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지게 죽어버리는 사나이! 배우 알랭 들롱
오승욱(영화감독) 2006-12-13
시퍼런 새벽 같은 허무한 운명의 표정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있었다. 총이나 칼을 맞고 죽어가는 주인공들은 자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애인이나 친구에게, 앞뒤에서 악당들이 에워싸고 있거나 말거나,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거나 말거나, 사랑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여동생을 부탁한다느니, 한 말 또 하고 또 하다가 옆집 삼돌이네 강아지에게 안부는 안 전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죽었다. 그 순간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며 우는 이모나 고모가 너무나 철없어 보였고, 어린 나를 극장에 데려간 고마운 이모와 고모를 얕잡아보기까지 했었다. 그런 형편은 주말의 명화나 동네 극장에 간간이 들어오는 할리우드영화들도 마찬가지여서, 동네 극장에 들어오기 한달 전부터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돈을 타내서 보러 간 <바이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멋있는 커크 더글러스가 기생오라비 같은 배신자 토니 커티스에게 손가락만한 부러진 칼에 찔려 죽는 것도 불만이었지만, 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토니 커티스에게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죽어버려, 커크 더글러스가 소뿔에 철철 넘치게 술을 따라 마시는 장면과 팔뚝만한 닭다리를 볼이 터지도록 뜯어먹는 멋진 장면만 없었더라면 두고두고 용서 못할 영화가 될 뻔했었다.

어린것들은 나쁜 것만 배운다고 동네 공터에서 전쟁놀이를 하던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같이 총에 맞고 죽어가면서 여동생과 어머니, 사돈의 팔촌까지 걱정하면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 댈 무렵에야 땅에 쓰러져 죽는 시늉을 하고는 저녁밥을 먹으러 집에 돌아가곤 했다.

<레드 선>

그러다 만난 영화가 있다. 극장 간판에는 장 가뱅과 리노 벤추라, 그리고 알랭 들롱이 우리를 굽어보며 서 있었던, <시실리안>이었다. 다른 것은 다 기억이 안 나지만, 알랭 들롱이 장 가뱅의 총 한방에 진흙 탕에 코를 박고 단호하게 푹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저럴 수가, 곧 여자가 달려와 알랭 들롱을 껴안고 뭐라고 한참 대사할 거라 생각했지만, 알랭 들롱의 돈 가방에서 뿌려진 돈 뭉치가 눈처럼 알랭 들롱의 주위에 떨어지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렇게 멋질 수가! 그 뒤 동네 극장에 들어오는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란 영화는 모두 보기 시작했는데, 찰스 브론슨,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나온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의 무국적 서부극 <레드 선>은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에 대한 애정만 아니었으면 욕이 나올 뻔했지만 참기로 했고, 이브 몽탕과 마카로니 웨스턴의 악당 장 마리아 블론테가 수염을 밀고 나온 <대결>을 보고서는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경찰들이 교활하게 파놓은 함정을 향해 알랭 들롱이 입을 꾹 다물고 프렌치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가는 숨막히는 라스트. 함정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나방처럼 함정을 향하는 이브 몽탕과 장 마리아 블론테. 도망갈 곳이라고는 없는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도망치는 알랭 들롱. 총성과 함께 푹! 하고 쓰러지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 영화는 <시실리안>에서보다 더 멋지게 들롱이 쓰러져 죽었고,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은 새벽 추위 속에서 마지막 입김을 토해내며 들롱이 죽은 영화 속의 공기가 극장 안의 담배 냄새와 그 밖의 시시한 냄새를 걷어내버리고 내 콧속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극장의 공기까지 메워버리는 죽음 전 마지막 입김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은 가위가 단두대 앞에 선 들롱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싹둑 잘라낸다.

들롱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내가 왜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아직 정리를 못하고 있다. 그가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검은 보자기가 얼굴에 씌워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단두대의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덜컹 하는 소리만 남는다. <암흑가의 두 사람>이었다. 지금 다시 보면 뭐 좀 그렇겠지만, 그 당시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온몸이 저릴 정도였다. 이렇게 몇편의 들롱 영화들을 보고 나니 얼마 전까지 내가 사랑하던 홍콩 무협영화들이 시시해 보이기 시작했고, 알랭 들롱이란 저 배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너무나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사본 것이 버스 정류장 신문 가판대에서 파는 불멸의 스타 시리즈 제3탄! <세계 최고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란 책이었다. 그 책에는 내가 알고 싶은 들롱에 대한 것이 멋있게 죽어버리는 다른 영화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가 바람둥이여서 몇명의 여자와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는, 내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과 그가 너무 잘생겨서 얼마나 많이 바람을 피웠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찍이 왕우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들이 영화와는 다르게 현실에서 얼마나 악당이고 저질스러울 수 있는지에 대해 통과의례를 거쳤기 때문에 별 영향은 없었지만, 그가 청소년기에 감옥을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으며, 외인부대에 입대해 인도차이나 전쟁에 나간 악당이라는 것을 알고는 좀 움찔했고, 어느 인터뷰에선가 자신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법질서를 어긴 적이 한두번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살인? 하고 침을 꿀꺽 삼킨 적이 있었다.

하여튼 그 책에는 반 이상이 영화 속에서 여배우와 정사를 나누는 반라의 사진들로 도배돼 있어서 다른 면에서는 좋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반라의 사진들 사이에서 이상하게 생긴 동그란 테의 검은 선글라스를 쓴 알랭 들롱이 음울한 얼굴로 밤거리에 서 있는 <암살자의 멜로디>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영화와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찰스 브론슨의 수갑 찬 손에 담배를 쥐어주고 무표정한 얼굴로 불을 붙여주는 들롱의 모습이 있는 <아듀 라미>, 프렌치 코트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알랭 들롱의 얼굴과 그 옆에 ‘사무라이’라고 써 있는 포스터 사진이 내 눈을 끌어 다행이었다.

서늘한 눈빛, 안간힘의 몸짓, 사악함과 경멸의 미소

<아듀 라미>

그 뒤 나는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볼사리노> 등등 동네 극장에 들어오는 알랭 들롱의 모든 영화를 출석 체크하듯 꼭 보았고, 나이를 먹어갔다. 코가 떨어질 정도로 추운 겨울날 까까머리를 털모자 속에 숨기고, 극장 안의 지도부 선생과 깡패들의 사나운 눈초리에 바들바들 덜며 명동 코리아극장에서 본 <르 갱>이 나의 소년 시절 본, 나의 맘을 사로 잡았던 마지막 영화였다. 영화 속 알랭 들롱의 멋진 죽음에 도취되기에는 너무나 삭막한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 뒤. 방위 복무를 하게 된 나는 고참들과 함께 땡땡이를 치고 불광동 시장통에 있는 시궁창 같은 동시상영관에 숨어들었었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 알려 하지도 않았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잠이나 자려고 들어갔던 것이다. 마침 당시 예쁘기로 소문난 여배우가 등장하는 멜로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비가 내리고 주인공 여배우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빗속을 달리자 우리는 자려고 들어온 목적을 잊고 영화에 집중했다가 그녀가 가슴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알자 바로 실망해 잠을 청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눈을 떴다. 알랭 들롱의 <루지탕>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 순간 아! 얼마나 좋아했던 알랭 들롱이었던가. 고참들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어도 난 눈을 부릅뜨고 영화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10여년 전 그 알랭 들롱이 아니었다. 얼굴은 주름지고, 야수처럼 잔인하게 푸르던 눈동자는 탁해졌다. 그리고 말이 많아지고, 자꾸만 뭘 설명하고, 슬퍼지거나, 분노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나의 눈은 다시 감기고 영화의 마지막에 간신히 눈을 뜨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슬프기를 강요하는 음악이 너무나 싫었고, 때마침 일어난 고참이 비명을 지르며 늦었다, 빨리 안 가면 우린 다 죽어라는 다급한 외침에 느릿느릿 죽어가는 알랭 들롱을 뒤로하고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알랭 들롱은 기쁘거나 좋아서 웃을 줄 모르는 사나이였다. 그가 입을 벌려 웃으면 그건 뭔가 사악한 조짐이거나 비웃음일 뿐이었다.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푸른 눈을 공기 중에 방치하다가 정신이 되돌아오는 순간 보이는 그의 몸짓은 주변에 펼쳐진 자신의 죄악들을 망연자실 바라보다 떨쳐버리려는 안간힘 같은 표정이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 초 좋은 감독들과 일을 하려던 야심찬 젊은이는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지우는 것이 거대한 표정을 만드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죽음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기에 죄악에 빠진 자의 허무한 운명을 도취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 그가 연기한 죽음은 그 어떤 배우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벌고, 힘이 생기면서 제작자가 되었고, 자기를 과시하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표정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슬프지만 뭐,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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