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쿄, 상파울루, 멜버른 등 6대륙 40여곳에서 산발적으로 열리고 미셸 공드리, 조너선 글레이저, 스파이크 존즈 등 지금은 유명해진 이름들에 먼저 주목한 영화제. 새롭고 독특한 위치에 있는 레스페스트에는 집행위원장이나 위원이란 직책이 없다. 프로의식을 갖춘 자원봉사자, 스탭 그리고 프로듀서가 있을 뿐이다. 7년 전 한국에서 첫 출발한 레스페스트에 동참했던 소재영 프로듀서는 이런 수평적 관계를 통해 여전히 발전과 도약을 꿈꾼다. 대학 교단에 서고 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제 준비를 위한 회의가 줄줄이 잡혀 있는 중에도 어렵게 시간을 내준 그를 만나 레스페스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들었다.
레스페스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문화관광부에서 2000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지정하며 영상부문 위원을 맡게 됐다. 당시 디지털영화제를 운영하고 싶었는데 마침 레스페스트 창립자들이 무척 협조적이어서 한국으로의 유치가 가능했다. 2000년에는 그해 사업으로 끝났지만 문광부가 손을 뗀 뒤에도 자원봉사자 친구들과 함께 일하며 계속 영화제를 이끌어왔다. 미국에서 프로그래밍을 끝낸 작품들을 수급받지만 미국 것만 트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국내 아티스트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국내 섹션이 전체의 약 30%가 될 만큼 비중이 크다.
레스페스트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꼽는다면. 관객은 레스페스트가 쿨하고 앞선 영화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미지를 유지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다른 영화제와 달리 매년 룩이나 디자인 자체를 완전히 바꾸니까. 레스페스트 관객은 대부분 연령대가 낮고 개성이 뚜렷한 편인데 디자인쪽이 강해 디자인에 관심있는 분들도 많고 파티를 잘 기획하는 영화제로 소문이 자자해 노는 걸 좋아하는 분들도 즐겨 찾는다. (웃음) 마케팅 용어를 쓰자면 트렌드세터, 얼리어댑터들이 관객인 셈이다.
영화제 운영에서 가장 힘든 점은 뭔가. 예산이다. 퀴어영화제도 사실 부도난 건데 레스페스트에도 그런 위기들이 있었다. 2002년 마지막 레스페스트가 될 것 같아 크게 터뜨리고 가자 했는데 우연히도 그해 관객이 많이 모였다. 관객이 없는 영화제는 사라져야 하지만 관객이 있는 영화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 고비를 레스페스트는 관객의 힘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앞으로 레스페스트는 어떤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가장 중요한 건 구성력과 창의력이다. 레스페스트가 기술적으로 앞서 있는 작품만을 뽑는 건 아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어떻게 표현했나에 집중한다. 예전에 ‘컷 앤 페이스트’란 섹션에 미셸 공드리의 동생이 작품을 출품했다. 커피잔을 조금씩 손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적인 기법을 사용해 찍은 작품이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레스페스트를 디지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디지털은 이미 무의미해졌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혁신을 추구한다.
영화연출은 계속할 생각인가. 그렇다. 레스페스트 역시 영화를 만들 듯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