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개월 전, 남들에겐 있는데 내가 갖지 못한 세 가지가 있었다. 나는 직장이 없었고, 통장 잔고가 없었으며,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통산 여섯 번째(많기도 하지!) 직장이 장렬히 전사한 뒤, 엄청나게 남는 시간과 얇은 지갑을 주체 못해 간간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참이었다. 이따금 전전(前前) 직장을 들락거리며 옛 사수들에게 “어이, 오랜만이야→왔냐?→또 왔냐?→한가한가 보구나→…왔군”이란 소릴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자발적) 백수세계에 입문한 전전 회사의 편집장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실업급여를 함께 신청하러 가자는 것이었다(우리는 한 동네에 산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것도 없는데 이런 거라도 악착같이 받아야 한다며, 나는 기꺼이 집을 나섰다.
실업급여를 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고용안정센터의 분위기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사회 경제인이거나 백수이거나. 편집장과 기자가 대체 웬 말인가? 우리는 그저 면목동 혹은 묵동 주민일 뿐이었다. 그러나 몇년간 견고했던 상하관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이 시추에이션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게다가 며칠간 백수의 자유를 만끽하고 나타난 선배의 옷차림은 한술 더 떴다. 위아래 세트로 맞춰 입은 선명한 초록색 추리닝에 흰 운동화. 굳이 서류심사를 거치지 않더라도 바로 실업급여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자유인의 아우라였다. 어쨌든 나른한 여름날 오후, 긴장이 풀릴 대로 풀린 우리는 교육실에 나란히 앉아 실업급여 신청서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목적도 이유도 모를 조촐한 자축연을 벌였던 것 같다.
두달 뒤. 나는 공덕동에 새 둥지를 틀었고, 그녀는 실업급여 일부를 들고 그토록 염원하던 이베리아 반도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마감의 지루함 속에서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갈 무렵, 그녀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모로코의 어느 PC방이라 했다. “dae choong hae.” 독수리 타법으로 쳤을 게 분명한 이 말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한 조직에 있을 때만 해도, 좀더 치열하게 살 수 없냐며 다그치던 그녀였다. 잠들기 전 몇분간만이라도 잡지에 대해 고민하라고, 친구들만 만나지 말고 취재원을 섭렵하라 엄포를 놓던 그녀였다. 내 인생 중 가장 하드코어였던 그 시절, 나는 그녀의 마르지 않는 체력과 열정에 징글징글해하곤 했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직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지금, 우리는 점점 수평적 관계로 변화해가고 있다.
그녀가 떠나고 없는 지금, 그곳에는 ‘생계형 편집차장’이었던 K모 선배가 ‘생계형 편집장’이 되어 ‘생계형 마감’을 하고 있다. K모 선배와의 관계도 예전보다 훨씬 편안해지고 솔직해진 상태다. 횟수는 줄어들지 모르겠으나, 나는 앞으로도 가끔씩 그곳에 들러 그의 C급 농담에 추임새를 넣을 생각이다. 그나저나 예전엔 왜 몰랐을까. 공동의 목적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줄 줄을. 이들이 내 인생에서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역시,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사실이다. 2006년 11월, 내겐 예전에 없던 세 가지가 생겼다. 새 직장이 생겼고, 조기취업수당이 생겼으며, 정신적 친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