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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

이윤기의 세 번째 장편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이 개봉한다. 조용하게 큰 홍보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다. 그러나 영화를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할 이야기들이 꽤 많다. 두편의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들이 좀더 정밀하게 묶인 형태의 영화가 나왔고, 상업적 부담에서 벗어나 있어 그런지 자유로운 영화적 필치도 엿보인다. 갑작스럽게 떠밀려 시작된 한 여자의 하룻밤 이상한 여정을 통해 기묘한 삶의 애착을 길어올리는 영화다. 올해의 아주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만한 <아주 특별한 손님>을 소개한다.

삶을 향해, 자아를 찾아 ‘한 걸음 더’

“저는 미요코가 아니에요. 루미에요. 오사와 루미라고 해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아주 특별한 손님>의 원작인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소설 <애드리브 나이트>의 주인공은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간단히 말해버린다. 독자는 이 여자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찾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그녀의 진술에 따라 확실히 알고 시작한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보경(한효주)은 같은 순간을 맞지만 주저하다 때를 놓친다. 영화적으로 보면 그 순간을 부여받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행위는 중요하기 때문에 뒤로 미뤄진다. 영화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에 이르러서야 “제 이름은 보경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감독과 각색을 겸한 이윤기는 원작에서 그다지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은 이 장면이 영화의 뒷부분에 방점으로 놓일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작은 목소리로나마 자발적으로 호명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초반에 자기 이름을 말하는 때를 놓치는 것은 영화의 미스터리 구조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아주 특별한 손님>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인지를 원작과의 차이를 통해 보여주는 예가 된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육신이 이름을 찾아나서는 영화이며, 스스로의 호명 행위를 통해 정체를 회복하려는 영화이다.

인물과의 교감을 증폭시키다

대낮의 도시 서울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한효주)가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두명의 남자들,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믿을 만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생면부지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반말로 말을 건다. “명은아, 고명은 맞지?” 여자는 대답이 없다. 그냥 아니라고만 한다. 몇번을 더 우기던 남자들은 한바탕 서로 뭔가 토론을 벌이더니 좀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오해하게 된 사정을 털어놓는다. 지금 같은 마을에 사는 아저씨 한명이 죽어가고 있고 그에게는 오래전 집을 나가 서울로 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는 딸이 있는데, 당신이 그 여자와 착각할 만큼 비슷하게 생겼으니 우리와 함께 가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딸의 대역을 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황당한 제안에 여자는 망설이지만 의아하게도 곧 수락한다.

이 첫 장면은 이윤기의 지난 두편의 영화가 모두 그렇듯 기습적인 핸드헬드로 시작한다. 마스터 숏이 없으며 더불어 내용적으로도 인물들에 대한 배경과 상황에 대한 밑그림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쫓아가야 그 인물이 정말 누구인지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보경뿐만 아니라 그녀를 오해에 빠뜨린 명은이라는 여자에 대해서도(그리고 사내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영화를 누구의 진술에 의지하여 쫓아갈 것인가 조바심을 느낀다. 가령 자신이 명은이가 아니라고 말한 여자는 정말 명은이인데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혹은 이 여자에게 간절한 청탁을 해온 남자들의 사정은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라고 말이다.

일행이 시골 마을에 도착하여 이곳이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그리고 아직은 이름을 말하지 않은 보경이 정말 여기에 처음 와보는 사실이라는 걸 확고하게 알려주기 전까지 우리는 한참을 그들의 진술과 행동을 예의 주시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런 방식은 <여자, 정혜>와 <러브토크>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지만,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는 특히 더 강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중요한 건 이것이 단순히 긴장을 위한 방책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순간 찾아드는 간헐적 의심 자체로 인해 보경과 명은 사이를 끊임없이 연계하고 상상하게 하는 교감의 장치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명은이 아니라고 말한 여자가 명은이 되기로 작정하면서 시작된 그녀들의 상상적 결연을 말이다. 다만 이 영화는 철저히 지금 보경의 몸에 붙어 동행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머지 인물 명은을 다 알 수 없을 뿐이다.

기묘한 아이러니에서 유머를 찾다

마을에 도착하자 영화의 톤이 갑자기 바뀐다. 보경은 다소 홀로 밀려나고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곧 생을 마칠 게 뻔한 아저씨의 집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소란에 가까운 짓들을 벌인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묻어두었던 서로의 묵은 감정과 잇속 계산이 고개를 들고, 젊은이들은 냉소와 무관심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빠르고 꽉 짜인 커팅과 쇼트를 통해 영화는 인물들 사이의 치고받는 감정들을 담아낸다. 이 장면의 연출을 보면 주인공 1인 내지는 2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연출자 이윤기가 다수 인물의 갈등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묘파해낼 능력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두편의 전작에서는 덜했던 유머러스한 면들이 그 장면을 통해 고개를 들고, 동시에 그 유머는 비릿한 속내까지 같이 드러낸다. 이 부분은 죽음 앞의 소동이라는 상황에 걸맞을 만큼 그로테스크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그 사이에 마을에 도착한 보경이 명은을 대신하여 하는 일은 두 가지다. 명은의 방 안에서 보경은 우연히 명은의 양말을 신어본 뒤 그 양말을 다시 벗을 때까지 두 가지 ‘노릇’을 한다. 하나는 딸 노릇이며, 또 하나는 애인 노릇이다. 보경이 명은이 되어 하는 그 행위를 눈여겨보는 것은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가 된다. 더욱이 그중에서도 딸이 된다는 것은 보경이 자기의 이름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원작의 루미와 다르게 행동하는 중요한 한 가지다. “내가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말할 거라면 미요코씨가 말해야죠. 게다가 아버지가 그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하는지 어떤지 모르잖아요”라고 원작에서 루미는 말한다. 그녀는 딸의 대역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루미로 남는다. 그러나 보경은 죽은 아저씨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한다. 우리는 그걸 듣지 못하지만 그녀 말에 따르면 “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는 미리 약속했던 말을 한 거라고 한다. 정확히 그 말인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명은의 대역을 자처한다. 여기서는 자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 나서는 육신의 영화

아저씨가 세상을 뜨자 보경은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그녀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하긴 힘들다. 그건 일종의 영화적 의식에 가까운데,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한 자의 망연자실한 깨달음의 의식이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보경이 하는 일은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것이다. 이때쯤 미스터리는 이 영화에서 더이상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삶의 경로의 일탈을 통해, 그 울음을 통해, 어떤 회복의 조짐을 가졌다는 것이 좀더 중요해진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와 엄마 사이에는 좋은 감정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문득 보경은 삶을 생각하며 엄마를 생각하고, 그 관계의 회복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상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완전히 해결되거나 성공한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을 사람은 죽었고, 돌아올 사람은 돌아온다. 그런데도 그걸 겪은 인물과 우리의 감정이 변한다. 명은은 아저씨가 죽고 난 다음에 딸 역할을 했으므로 사실상 그녀는 애초에 그 자리에 가서 해야 할 역할을 확실히 수행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보경의 신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 와중에 모든 것이 변할 조짐이 생겼다. <아주 특별한 손님>이 주는 기묘함 중 하나가 그것이다. 이탈이 희망의 귀환으로 이끌리고, 대역이 자아를 찾는 비결이 되었다는 것 말이다.

자유로운 개념과 화법으로 전진한다

<아주 특별한 손님>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나서는 육신의 영화라는 것은 앞서 지적했다. 덧붙여 이윤기의 영화에서 인물이 자아를 찾아나서는 것이 세 번의 영화 모두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건 이 영화를 볼 때 필요한 과정이다. 이윤기의 인물들은 지리적 이동 혹은 그 말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동선의 일탈을 통해서 자기애의 깨달음으로 찾아들어간다. <여자, 정혜>의 정혜에게 경로의 이탈이 생기거나, <러브토크>의 써니가 LA에서 서울로 삶의 터전을 바꾸어낸다면,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하룻밤 이탈의 경험으로 인해 자기를 찾는다. 전작 두편에서 사랑과 남자는 동기는 되지만 결정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윤기의 여자주인공들에게 사랑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혹은 그와 관계된)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는 그것을 죽음과 생환에 대한 관계로 확장한다. 한 육신이 사멸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나서야, 그 사멸과 관계된 어떤 미지의 여자의 대역을 이루고 나서야, 그녀의 육신은 이름과 자아를 찾는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이윤기의 세편의 영화 중 가장 자유로운 개념과 화법으로 가득 찬 영화다. <여자, 정혜>의 고독과 <러브토크>의 전환을 지나 교감과 생환에 대한 열망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이윤기의 영화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적 기대치는 그가 1쪽짜리 단편소설을 갖고도 백분짜리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영화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일 것인데, 이번 영화가 그 한 징조다. 환영적 위치에 머무르는 육신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들 등은 여전히 어떤 문제의 빌미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 밖의 지점들은 확실히 전작들보다 한발 더 자유롭게 나아간 듯 보인다. 그점에서 <아주 특별한 손님>은 올해의 아주 특별한 영화 중 한편으로 충분히 꼽을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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