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종합촬영소 내에 있는 소품센터의 주인공은 모두 다섯명이다. 차순하, 김호길, 이태우, 김태욱, 이예호 등 1960년대부터 소품 스탭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이들은 한국영화 소품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과거 한국영화의 소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들을 찾는 건 당연한 일. 현재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등에 참여하고 있어 모두 함께 자리하지 못했지만, 손재주라면 충무로에서 따라갈 자 없다는 차순하, 오랫동안 시대의 흔적을 수집해온 김호길, 전국에 모르는 골동품상이 없다는 이태우 등 3인에게서 지난 40년 동안의 충무로 소품사를 들었다. 인터뷰는 <근대의 풍경-소품으로 본 한국영화사>(차순하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를 참조해 이뤄졌음을 밝힌다.
“사극 촬영하면 엑스트라가 200∼300명씩 나오는 군중신 있잖아. 근데 내일 갑자기 몹신이 생겼다면서 영화사에서 오늘 아침에야 연락을 한다고. 배우가 스케줄 된다고 하니까 갑자기 촬영 잡는 거지. 소품 사정은 안중에도 없어.”(차순하)
1961년 충무로의 적벽대전이라 불리는 홍성기의 <춘향전>과 신상옥의 <성춘향> 맞대결을 시작으로 영화계에는 사극 붐이 인다. 영화관람료 70원 시절에 “총제작비 2500만원, 엑스트라 10만명 동원, 말 300필 공수”라는 물량공세를 앞세운 <화랑도>, “시흥과 안양 일대의 야산을 모조리 야외세트로 뒤덮었다”는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외에도 <칠공주> <인목대비> <대심청전> 등 대형 사극들이 1962년 한해에 쏟아나왔다. 해외 로케이션이나 CG가 없던 시절, 블록버스터는 곧 사극을 의미했다. 195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제작부나 연출팀이 소품을 해결했던 상황에서 “1950년대 중반(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을 기점으로)과 1960년대 초 두번에 걸쳐 분출된 대형 사극 붐”은 소품팀의 존재를 깨닫게 했다. 사극 붐과 함께 1960년대에 소품팀이 충무로에 자리잡지만, 작업 방식은 요즘과 비교하면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였다.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에 참여했다는 차순하의 말을 들어보자. “스케일은 당시에 최고로 컸지. 근데 소품을 어디서 빌려올 수가 없다고. 제작된 게 없으니 왕관이든 의상이든 투구든 깃발이든 다 만들어야 했어. 200명 이상 나오는 군중신 경우엔 난데없이 연락을 해오니 밤샘 작업을 해야 했지. 지금이야 다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다 손이었다고. 두꺼운 마분지를 여러 겹 풀칠해서 몇 백개의 투구 ‘가다’를 만들어놓고 잠깐 눈을 붙인 적이 있는데, 쥐새끼들이 나타나서 다 갉아먹는 바람에 낭패를 본 적도 있고.” 이태우씨는 1961년 <쟌발쟌>(장발장) 때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준다. “배경이 상하이인데 촬영은 만리동 스튜디오에서 했거든. 중국식 주발을 구해오라는데 그렇게 큰 걸 갑자기 어디서 구하느냐고. 결국 가운데 구멍 뚫린 과자 200개를 밤새 뀄지. 후시녹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넣으니까 그럴듯해서 칭찬을 많이 받긴 했는데 돌이켜보면 좀 그렇지.”
“난 선배들이 가끔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왜 대품(大品)이라고 안 부르고 소품(小品)이라고 불렀을까. 자그마한 소도구만 만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가끔은 그래. 소품이라고 불러서 보잘것없는 일처럼 여겨졌던 것 아닐까 하고.”(김호길)
촬영현장에서 소품팀은 까탈스러운 배우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았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명의 배우가 여러 편의 영화에 동시에 출연하는 가케모치가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하류인생>에서 등장하듯이 힘깨나 쓰는 제작부장들이 배우들을 촬영현장으로 모시기 위해 윽박과 완력을 행사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차순하씨는 “마지못해 끌려온 배우들 중엔 다른 촬영장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공연히 소품이 맘에 안 든다며 되레 성내고 나가는 일도 많았다”면서 “저쪽 현장에 갈 시간이 됐는데 이쪽 촬영이 아직 안 끝났다고 쳐봐. 게다가 저쪽 영화사로부터 개런티를 더 받았다고 하면 배우로선 저쪽에 신경이 더 많이 가겠지. 그러니까 적당한 핑계를 찾는 데 만만한 게 소품이라고. 최남현이라는 배우가 성질 고약하기로 가장 유명했는데. 주연배우가 소품 던지고 분장 떼버리고 나가버리면 감독하고 스탭들에게 눈총받는 건 죄없는 우리였지”라고 말한다. “하루 세끼 먹는 것으로 만족했던” 시절이었지만, 소품팀에 대한 처우는 다른 부문 스탭들에 비해 더 열악했다. 대표적인 것이 제작비 산정 방식. 대개 1960, 70년대 소품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체 제작비에서 개런티부터 각종 제작 비용을 모두 제한 다음 맨 마지막에 남는 금액 내에서 치러지곤 했다.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어음으로. 차순하씨는 “지금까지 영화사들의 부도로 인해 현금으로 돌려받지 못한 어음을 다 합하면 2억원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태우씨는 “소품을 직접 구입하고 제작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영화사에선 대여료 정도를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덧붙인다.
“소품이라는 게 물건 만들고 구하는 일만은 아니었어. 1970년대까지도 지금으로 치면 특수효과, 의상 일부까지 소품이 다 했으니까. 대중 없었지, 뭐. 피아노줄도 우리가 구하고 그랬어.”(이태우)
낮은 처우에 비해 소품팀이 떠맡은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눈 뿌리는 일 등도 소품팀 몫이었다. “처음엔 군인들 침낭을 사다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닭털을 이용해서 눈을 만들었어. 가위로 밤새 닭털을 잘게 자른 다음에 현장에서 뿌리는 거지. 근데 이게 옷에 들러붙으니까 문제인 거야. 나중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럭스 가루비누를 뿌렸는데 이것도 뭐 눈에 안 녹고. 게다가 또 너무 비싸. 스티로폼을 갈아서 뿌릴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어.” 차순하씨는 1980년대 초까지도 소품이 지금은 미술, 특효, 의상, 분장이 맡고 있는 업무까지 맡았다고 전한다. 이를테면 활과 화살, 총기 등도 직접 관리해야 했다. 화살이나 단도를 매달 와이어뿐 아니라 배우의 의상 안에 부착할 나무판자까지 소품팀에서 구해왔다. “가끔은 판자가 너무 얇아서 말 타고 달리던 배우 가슴팍에 진짜 꽂힌 적도 있다고. 물론 그 조연배우는 혼신의 연기를 위해 아픈 척도 안 했지만.” 김호길씨는 <개벽>(1981)을 찍을 때 500여명의 군중이 양손에 들 횃불 1300개를 준비하다 기진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솜방망이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테이크가 계속될 때마다 새로 준비해야 했으니까 힘들었지. 처음엔 기름통 2개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촬영 때는 무려 8개나 들더라니까.”
“1970년에도 소품창고가 있었지. 소품실만 따로 있진 않았고, 의상이랑 특효랑 돈이 많아서 창고를 만든 건 아니고. 그때는 스튜디오가 있어야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시대여서 그렇게 된 거지….”(이태우)
스튜디오가 없으면 영화 제작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1962년 제정되어 1980년대까지 유지된 영화법에 따라 영화사들은 200평 이상의 자체 스튜디오를 갖춰야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녹음, 현상시설, 조명 60kW 이상, 35mm 카메라 3대 이상, 2인 이상의 전속감독 및 남녀 전속배우, 5년 이상의 녹음 및 현상기술자 보유 등의 추가 조건까지 따라붙었다. 게다가 연간 15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지 못할 경우에는 영화사 등록을 취소한다고까지 했다. 이에 따라 70여개 군소영화사가 16개사로 통합됐고, 1963년에는 4개사만 등록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화’ 정책은 역효과만 냈다. 영화사들은 정미소 등을 스튜디오로 위장해서 영화사 등록을 하는 등의 편법을 썼다. 아이로니컬한 건 소품 스탭들에겐 이 어이없는 상황이 기회가 됐다. 유령 스튜디오를 빈 창고로 내주는 영화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81년 화재로 모두 불탄 뚝섬 소품창고(참고로 95년 우이동 화재 등을 비롯해 소품인들은 그동안 모아뒀던 어마어마한 소품들을 모조리 잃었다)도 그런 경우였다. 1980년대 태릉 소품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대영영화사의 스튜디오를 빌려쓴 것이다. 소품 스탭들은 이들 창고를 “공동보관, 공동운영” 원칙으로 운영하면서 “덤핑을 조장하려는” 영화사들에 맞서기 위한 협업 조직까지 만들었다.
“후원 같은 건 꿈에도 못 꾸지. 무엇보다 영화가 대접받던 시절이 아니었잖아. TV였다면 몰라도. PPL 같은 건 아예 생각도 못했어.”(김호길)
1960, 70년대 제작된 현대물의 경우 적잖은 생활용품을 해당 기업으로부터 협찬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같은 의문에 김호길씨는 고개를 젓는다. “지금 현대물이면 몰라도 당시에는 아니었다고. 일단 그때 당시 좀 사는 집의 거실이라고 해봤자 화분 모양의 장식장 위에 12인치짜리 TV 얹고 보는 게 전부였어. 지금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지만 당시엔 꽤 비쌌던 큰 액자 하나 정도 벽에 걸려 있고. 재밌는게 당시 집에서 쓰던 물건들 리스트를 뽑아보면 몇 가지 안 돼. 다 그렇게 살았다고.” 상황이 그랬으니 애당초 협찬 시도를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미미한 수준이긴 했으나 ‘사후 PPL’이 있긴 했다. 김호길씨는 “병원장면에서 박카스가 등장하거나 바장면에서 크라운, OB맥주 등이 나오면 나중에 스틸을 가져다주고 몇병 얻어오는 수준이었다”고 전한다. 예외도 있긴 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는 협찬 규모가 달랐어. 코미디영화인데 극중에 장충단공원에서 전국 주당대회가 열리는 장면이 있거든. 그래서 삼학양조장에서 대포 크기의 소주를 트럭으로 받았다고. 나중에 스탭들에게 한 박스씩 돌아갔는데 그때 가치로 계산하면 꽤 큰돈이었지. 나는 나중에 중국집에서 배갈하고 바꿔먹었지만.”(김호길)
“밥상 하나 차려도 반찬 가짓수를 세니까….”(차순하) “먹는 것만큼 이불도 굉장히 신경을 쓰신다고. 베개만 하더라도 광목이 아니라 나일론이나 천으로 만들었으면 혼쭐나지.”(이태우) “시대와 삶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먹고 자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나. 그때 살았던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은데 거짓말을 할 순 없으니까 그러시지.”
차순하, 김호길, 이태우, 이 소품인 세 사람 모두 임권택 감독과 오랫동안 작업을 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촬영 당시 동굴 한쪽에 라면을 쌓아두라는 지시에 연출부가 소고기 라면을 가져오자 “스님인데 왜 소고기 라면이냐”고 호통을 쳤다는 임 감독의 고집을 이해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스탭들이기도 하다. <천년학>에 합류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천년학>의 소품을 맡고 있는 김호길씨는 “뭘 원하는지 말 안 해도 아는 사이가 됐다”면서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손자뻘 되는 스탭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태우씨는 소품창고 일을 거드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소쿠리와 광주리와 채반의 차이를 모를 때면 답답하다. 물론 어르신 중에서도 종이컵을 모르는 분이 있지만”이라면서 세대 차를 걱정한다. 차순하씨는 “스탭들의 경우 인터넷이 있으니까 무엇이 필요한지, 그 이름이 뭔지는 알지. 근데 그 소품을 어떻게 쓸지는 잘 모르더라고”라고 아쉬워한다. 한번은 영화에서 썼던 물레를 CF 제작팀에 빌려준 적 있는데 정작 결과물을 보니 엉뚱한 부분에 실이 둘러져 있더란다. 김호길씨의 걱정도 다르지 않다. “요즘 시대물이라고 하더라도 영화 속 간판이나 플래카드 같은 거 그냥 컴퓨터체로 쓰는데 그게 맛이 날까 싶다”면서 “한 사람이 쓰더라도 글자마다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도 제 방식만이 맞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왕의 남자>를 보면 고증은 엉망”이라면서도, 요즘 관객이 화려한 비주얼을 더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만, 현장 스탭들에게 도움되는 두툼한 소품백과사전을 내고 싶고, 소품센터를 기관이 체계적으로 운영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가 50년 소품지기들의 마지막 바람이다.